"내 '찐친' 노태우, 대통령 직선제와 북방 외교는 높이 평가 받아야"

박현영 2021. 10. 29. 18: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89~93년 주한 미국대사 그레그 인터뷰
"골프 내기, 노 전 대통령 돈 1000원 땄다"
테니스 시합.."서로 못할 얘기가 없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자택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인연을 떠올렸다. [아멍크(뉴욕주)=박현영 특파원]


“주한 미국대사로 재직 중 공로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의 표시로 이 패를 드립니다. 한국 국민은 귀하가 양국 간 우호를 더욱 돈독히 하는 데 소중한 기여를 한 것을 깊이 감사하며 오래도록 기억할 겁니다. 따뜻한 애정을 담아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

지난 2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아멍크에 있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 자택에 들어서자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새겨진 감사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난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레그 전 대사가 1993년 2월 이임할 때 선물한 감사패다.

감사패는 그레그 전 대사 임기 종료(2월 27일)를 엿새 앞두고 증정됐다. 노 전 대통령의 5년 임기 종료(2월 24일)를 사흘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그레그 전 대사의 3년 반 한국 근무 기간은 노 전 대통령 재임 기간과 일치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감사패. [아멍크(뉴욕주)=박현영 특파원]


1927년생인 그레그 전 대사와 32년생인 노 전 대통령은 연배도 비슷해 "친한 친구로 지냈다"고 그레그는 회고했다. 그레그 전 대사는 94세 고령인데도 옛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억했다.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은 유감"이라면서 "주재국 국가 정상과 외국 대사가 돈독한 관계를 맺는 것은 흔치 않지만 노 전 대통령과는 그게 가능했다"고 떠올렸다. 다음은 일문일답.

-노 전 대통령과 어떻게 '친구'가 됐나.
"우리는 진짜 친구(real buddies)였다. 관계가 매우 좋았다. 그는 내가 대사인 기간 내내 대통령이었다. 우리 둘 다 테니스를 매우 좋아해 함께 자주 쳤다. 노 전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 코트로 초대했다. 골프도 많이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어울리기 쉬운 사람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테니스와 골프를 함께 즐겼다. [그레그 저서 'Pot Shards']


-테니스나 골프가 업무에 도움이 됐나.
"그렇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못 나눌 얘기가 없었다고 자신한다. 그렇게 신뢰를 쌓았다. 농담은 물론, 서로 놀릴 수 있는 관계였다. 한 번은 노 전 대통령이 골프 내기에서 져서 내게 1000원을 준 적이 있었다. 김옥숙 여사와 내 아내 멕이 합류한 혼합 복식 테니스에선 우리 부부가 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테니스와 골프를 함께 즐겼다. [그레그 저서 'Pot Shards']


그레그 전 대사는 노 전 대통령과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의 테니스 경기를 주선하기도 했다. 일본 정상과 경기할 때는 미국팀 대 일본팀 구도로 짰는데, 한미 정상 시합은 두 대통령이 한 편을 먹고 참모들이 한 팀이 돼 겨뤘다. 그레그 전 대사는 이를 "시합 승패와 승진 여부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경기"라고 표현했다.

-노 대통령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인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는 중대한, 매우 중대한 업적이다. (major이란 단어를 3번 썼다) 그전까지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출 방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무척 심했는데, 그것들이 멈췄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에 대해서는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별세 이후 읽은 몇몇 기사는 실망스럽다."

-노 전 대통령의 5ㆍ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역할 때문일 것이다.
“맞다. 매우 어려운 문제다. 기본적으로 노 전 대통령도 관련 있지만, 나는 그 문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전 전 대통령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 거짓말하는 바람에 한미 관계가 많이 어려워져 수습하느라 힘들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의 북방 외교 정책을 미국이 지지했는데.
“북한 우방이었던 소련, 중국과 수교한 것은 노 전 대통령의 넓은 비전을 보여준다. 미국과도 충분히 상의했고, 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99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남을 주선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에 대한 중국 반대를 꺾는 데 미국이 힘을 보탰다.”

그레그 전 대사는 노 전 대통령이 “매우 정교한 외교”를 펼쳤다고 평가했다. 북방정책 추진으로 그레그 전 대사 부임 시 한국에 대사관을 연 동유럽 국가는 헝가리가 거의 유일했는데, 이임할 때쯤에는 대부분 동유럽 국가가 서울에 대표처를 두게 됐다고 한다.

-북방 정책이 한미 동맹에 영향을 미쳤나.
"노태우 정부와 신뢰가 깊었기 때문에 한국이 옛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한다고 해서 한미 동맹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는 안 했다. 오히려 냉전 해체 후 미국이 옛 소련 등과 원활한 관계를 맺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노태우 정부는 매우 효율적인 정부였다. 특히 그는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길 원했기에 나 역시 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는 미국 뉴욕주에 있는 자택을 한국 고가구와 소품으로 꾸몄다. [아멍크(뉴욕주)=박현영 특파원]


노 전 대통령의 감사패 옆에는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과 그레그 전 대사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한국 대사로 오기 전 6년 반 동안 당시 부시 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일했다.

부시가 부통령 시절 세계 65개국을 함께 순방하며 미국 외교 현장을 경험한 '거물'이었다. 하지만 이란 콘트라 사건(1985~87년)으로 조사를 받게 되면서 당시 직급에 걸맞지 않은 작은 공관인 한국에 부임하게 됐다.

착잡한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레그 전 대사는 "그때 내 표정이 안 좋았는지 아내 멕이 '돈, 웃어야 할 것 같아요'라고 조언했다. 나는 바로 표정을 고쳤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이내 한국과 한국 사람에 푹 빠졌다. 일본에 10년 근무하고, 한국에서는 미 중앙정보국(CIA) 지국장 2년, 대사 4년 등 총 6년 근무했지만 “한국 사람 기질이 나와 더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인과는 함께 불만을 공유하고 뒷말도 하면서 친구가 될 수 있는데 일본인과는 그게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자 한국 대사직의 매력이 보였다. "전 세계 공관장 가운데 가장 도전적이고, 흥미롭고, 어려운 자리이면서 해야 할 일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도널드 그레그 대사 전 대사는 1993년 호암갤러리의 '분청사기전' 포스터를 벽에 걸어놨다. [아멍크(뉴욕주)=박현영 특파원]


집안 곳곳에서 한국 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현관문에서 대형 장독 두 개가 손님을 맞았다. 고가구는 책꽂이나 탁자로 쓰인다.

손님용 화장실에는 생활 자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세면대 옆에는 1993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중앙일보 후원, 삼성전자 협찬의 '분청사기명품전'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아멍크(뉴욕주)=박현영 특파원 park.hyunyo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