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전 떨어졌던 유영, 독해져서 돌아왔다
지난 25일(한국시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 ‘스케이트 아메리카’ 여자 싱글 경기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올리언스 아레나. 영화 ‘레미제라블’의 사운드트랙(OST)이 끝나면서 유영(17·수리고)이 오른팔을 번쩍 들어 올리자, 관중 수백 명이 벌떡 일어서 박수를 보냈다.
유영은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27일 중앙일보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연기를 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했다.
총점 216.97점을 기록한 유영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쇼트 프로그램에서 트리플 악셀(3.5회전 점프) 착지 실수로 5위에 그쳤지만, 프리스케이팅에선 모든 점프를 잘 뛰면서 2위를 기록했다. 그가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서 메달을 딴 것은 2019~20시즌 그랑프리 2차 대회 동메달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유영은 “코로나19로 힘들게 훈련했다. 오랜만에 많은 관중 앞에서 진행된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 기쁘다”고 했다.
유영은 내년 2월 열리는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은 선수다. 한국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트리플 악셀을 뛰는 데다,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영이 입상한다면 2010년 밴쿠버 대회 금, 2014년 소치 대회에서 은을 딴 김연아(31)에 이어 한국 피겨 사상 두 번째로 올림픽 메달을 딴 선수가 된다.
그런데 지난해 유영의 점프가 흔들렸다. 급기야 2월 국가대표 선발전인 종합선수권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선 트리플 악셀, 트리플 토루프 등을 뛰다 넘어져 4위를 기록했다. 결국 세계선수권대회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2018년부터 3년 연속 이 대회 우승자였던 유영이 입상하지 못한 건 예상 밖이었다. 그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 대회에 나가면 많이 긴장했는데 결국 실수했다”고 전했다.
유영의 상승세가 꺾인 건 코로나19로 인한 훈련 부족 탓이었다. 그의 전담 지도자는 하마다 미에(62·일본) 코치다. 원래 하마다 코치와 미국 콜로라도주 스프링스에서 훈련하다가 코로나19로 현지 사정이 악화하면서 국내에서 홀로 훈련했다. 화상 코칭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프가 안 되면 어떤 문제가 있는지 봐주는 사람이 없어 답답했다. 혼자 훈련하면서 안 좋은 습관이 생긴 걸 알지 못했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곧바로 짐을 싸서 하마다 코치가 있는 미국으로 갔다. 하마다 코치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표 의식을 잃었던 유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2010년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던 여섯 살 꼬마처럼 훈련했다. 힘들 때마다 유튜브 방탄소년단(BTS) 댄스를 따라 췄다. 올 시즌 갈라쇼 음악도 BTS 노래로 선정했다.
유영은 한때 고난도 점프에 매달려 연기가 유기적이지 못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번 시즌에는 점프 사이에 세밀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스케이팅은 한 편의 영화 같아졌다. 그는 “올림픽 시즌이라 내 경기를 예술 작품처럼 보이게 하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올림픽 메달 욕심이 크다. 유영은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승했지만 나이 제한(올림픽 직전 7월 기준 만 15세)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다. 당시 유영은 “베이징올림픽에선 메달을 따고 중국어로 소감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고난도 점프 경쟁이 치열해지자 지난해에는 “올림픽을 위해 쿼드러플 점프도 뛰겠다”고 했다.
지난 1년 깊은 슬럼프를 보낸 이후 마음가짐이 사뭇 달라졌다. 유영은 “쿼드러플 점프를 뛰고 싶지만 조바심내지 않겠다. 쿼드러플 점프에 안정감이 느껴질 때 프로그램에 넣고 싶다”면서 “베이징올림픽은 끝이 아닌 시작이다. 계속 도전하면 된다”고 말했다.
유영이 이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준비’였다. 그는 “은반에서 나를 믿지 못하고 긴장했던 건,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란 걸 알았다. 차근차근 준비해서 베이징올림픽에선 편안하게 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유영은 캐나다 밴쿠버에서 훈련을 이어가고 있다. 11월 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그랑프리 4차 대회에 출전할 때까지 또 타지에서 구슬땀을 흘린다. 미국, 캐나다, 일본 등 세계 곳곳을 누빌 때마다 그의 어머니 이숙희(51)씨가 함께 한다. 유영은 "표현을 잘 못하는데 정말 감사하다"고 전했다.
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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