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4) 찰스 그레이 백작 이름을 딴 '얼그레이'

2021. 10. 2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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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향기를 입히려는 끝없는 시도

차를 마시다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분명 차나무 잎을 따서 만들었는데 장미꽃 향기도 나고 난꽃 향기도 난다. 과일 향기가 나는 차도 있다. 혹시 차에 꽃과 과일을 넣었나 싶어 잎을 뒤져봐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하긴 좋은 용정차에서는 고소한 콩고물 향기가 나는데 설마 용정차에 콩고물을 묻혀서 그런 향기가 나겠는가?

좋은 향이 나는 차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차 만드는 사람이 오래 경험을 쌓고 기술을 축적해야 정말 향기가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다. 언젠가 한 백차를 마시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9월달에 만든 차와 10월달에 만든 차를 마셨는데 두 차의 향기가 다른 게 아닌가. 9월의 차는 찔레꽃 향기가 나고 10월의 차에서는 푸릇한 향기가 났다. 70년간 백차만 만들었다는 그 차를 만든 이는 “9월의 햇빛과 10월의 햇빛이 달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좋은 차를 만들려면 심지어 햇빛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써야 하나 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백차 장인처럼 70년간 차를 만든 베테랑 기술자가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람이 만든 차는 정말 운이 좋아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숙련된 기술이 없어도 차에 직접적으로 향기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차에 향기가 나는 물질을 넣는 것이다.

재스민꽃은 중국 사람들이 명나라 때부터 화차를 만드는 데 이용했다. 향이 매우 강한 꽃이다. 재스민꽃과 녹차를 섞어 놓으면 꽃의 향기 성분이 차의 표면에 부착해서 향기 나는 차가 된다.
천 년 전 중국 사람들은 이런 방법을 써서 차에서 특별한 향기가 나게 했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황제에게 바치기 위해 매우 공을 들인 차를 만들었다. 잎을 밀가루처럼 곱게 갈아 용과 봉황이 새겨진 틀에 넣고 찍었다. 용은 황제를 상징했다. 황제가 마실 것이니 좀 더 특별하게 만들자는 생각에 ‘용뇌’라는 값비싼 향료를 갈아 넣었다. 용뇌는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침향 같은 것이다. 이 차는 특별하기는 했지만 차로서는 그다지 좋은 점수를 얻지 못했다. 차를 진상받은 황제가 “차에 용뇌를 넣으니 차의 참맛이 사라진다”고 혹평하며 용뇌를 넣은 차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기이한 맛과 향을 내는 용뇌차는 그래서 살아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중국 사람들은 다음에는 차의 참맛을 손상하지 않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차에서 꽃향기가 나게 하기 위해 차와 향기가 좋은 꽃을 버무려놓는 것이다. 그러면 꽃의 향기 성분이 찻잎 표면에 붙어서 차에서 꽃향기가 났다. 물론 꽃을 넣지 않고도 가공을 잘하면 은은한 꽃향기가 나게 만들 수 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찻잎에 본래 있는 향기 성분으로 장미와 비슷한 향기, 하얀 꽃과 비슷한 향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꽃을 넣고 버무려서 노골적으로 강한 장미 향기, 재스민 향기가 나게 만든 차를 가리킨다. 중국 사람들은 600년 전부터 이 방법을 썼다. 현대에도 이런 차는 꽤 인기가 있다. 중국 식당에서 무료로 제공해주는 재스민차도 이렇게 만든다.

차와 향기 나는 꽃을 비벼놓으면 되지만 만드는 과정은 역시 고되다. 이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한다. 재스민꽃 향기는 낮 동안은 포도당과 결합해 숨어 있다 밤이 되면 포도당에서 떨어져 나온다. 꽃향기가 포도당에서 떨어져 나와야 비로소 재스민 향기가 난다. 그래서 재스민차는 밤에 만든다. 재스민꽃에서 향기가 흘러나올 때 작업자가 녹차와 재스민꽃을 섞어 둔다. 그게 끝이 아니다. 차와 꽃이 잘 섞이게 가끔씩 뒤집어줘야 하고 몇 시간 후에는 다른 꽃으로 바꿔주기도 해야 한다. 당연히 이 일을 하는 작업자는 밤새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잠깐씩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잘 뿐 바닥에 등을 붙이지도 못한다.

재스민차 만드는 일을 평생 했다는 기술자는 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난 밤에는 잠을 못 자요. 하지만 좋은 점도 있어요. 밤새 이 일을 하다 보면 꽃향기가 몸에도 배거든요.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뒤를 돌아봐요. 좋은 향기가 나기 때문이죠.” 밤에 잠을 자지 못하지만 몸에서 꽃향기가 나는 남자라니! 왠지 짠하면서도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향기가 밴 차도 있다. 정산소종이 대표적이다. 정산소종은 푸젠성 북쪽 둥무관이라는 데서 만든다. 둥무관은 봄 차를 만드는 시기에 비가 자주 온다. 비가 오면 품질이 좋은 차를 만들 수 없다. 품질이 좋은 차는 날이 맑아야만 만들 수 있다. 그럼 비 오는 날은 차를 만들지 않고 쉬면 되겠지만, 농부들 입장은 그렇지 못하다. 비가 와도 잎을 따서 어떻게든 차를 만들려고 한다. 하루 차를 만들지 않으면 그만큼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때 농부는 소나무 장작을 때서 실내 온도를 높인다. 문제는 소나무 장작도 비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비에 젖은 장작에 불을 붙이면 연기가 많이 난다. 자연스럽게 연기가 차에 배어든다. 소나무 연기 냄새가 밴 이 차는 예전에 유럽으로 많이 수출됐다. 유럽 사람들은 정산소종의 푸젠성 발음을 듣고 자기들 식으로 랍상소우총이라고 불렀다.

중국 사람들은 정산소종의 훈연 향이 계원 향과 같다고 한다. 계원은 용안이라는 과일을 말린 것인데 매우 진득하고 달콤한 향이 나며 훈연 향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랍상소우총 홍차를 마신 유럽 사람들은 이 향이 어떻게 만들어진지 몰랐기 때문에 베르가모트라는 시트러스류의 잎과 열매를 넣어 향기를 만들었다. 베르가모트가 용안인 줄 착각했다고 알려진다.
▶‘랍상소우총’ 훈연 향 구현하려 베르가모트 오일 뿌려

랍상소우총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포르투갈 캐서린 공주가 영국의 찰스 2세에게 시집갈 때 화려한 혼수품을 많이 준비했는데 그중 랍상소우총이 포함돼 있었다. 랍상소우총은 차를 즐겨 마시는 캐서린 공주 덕분에 영국 황실과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랍상소우총은 갓 만들었을 때는 소나무 연기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목초액을 뒤집어씌운 것도 같고 훈제 연어를 먹고 있는 것도 같지만, 시간이 지나서 독한 연기 냄새가 빠지면 달콤하고 좋은 말린 열대 과일 같은 향기가 났다. 영국 사람들은 대체 차에서 왜 이런 향기가 나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랍상소우총 가공하는 광경을 직접 보지 못한 그들은 아무리 궁리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마 차에 향기가 나는 과일을 넣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알음알음 중국인들이 ‘용안’이라는 과일의 향을 첨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같은 향을 구현하기 위해 용안과 비슷한 베르가모트라는 시트러스 계열 과일 껍질에서 추출한 오일을 차에 뿌렸다.

이 베르가모트 오일을 뿌린 차는 영국의 총리였던 찰스 그레이 백작 이름을 따서 ‘얼그레이’차라고 불렸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찰스 그레이가 중국에 외교관으로 갔을 때 그의 부하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를 구해줬는데 높은 관료였던 아이 아버지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백작에게 특별한 향기가 나는 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각색된 이야기다. 찰스 그레이 백작은 중국에 외교관으로 간 적이 없고, 중국 사람들은 향기 나는 과일 껍질에서 추출한 오일을 뿌려본 적도 없다.

그럼 왜 ‘얼그레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그레이 부인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늘 베르가모트 향기가 나는 차를 대접했는데 그 차는 언제나 인기가 매우 좋았다. 베르가모트 향기 차가 인기를 끌자 트와이닝이라는 영국 차 회사가 최초로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얼그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베르가모트 향이 나는 얼그레이차는 유럽에서 꽤 인기 있는 차가 됐다. 트와이닝사는 랍상소우총뿐 아니라 다른 중국 홍차, 인도의 다르질링 홍차, 실론 홍차를 원료로 한 얼그레이차도 만들고 있다. 얼그레이는 중국 출신 차가 유럽으로 가서 유럽 문화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탄생한 유럽식 특색의 차인 셈이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1호 (2021.10.27~2021.11.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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