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코리아]10차 개헌, 당장 합의 되는 것부터 단계적으로..'개헌=천지개벽' 인식부터 깨야

송승환 2021. 10. 27.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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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 대회의실에서 열린 리셋코리아 개헌 좌담회에서 분과위원들이 토론하고 있다. 왼쪽부터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상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전성철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신필균 복지국가여성연대 대표. 장진영 기자

9차 헌법 개정으로 ‘1987년 체제’가 들어선 지 34년이 지났다. 6월 민주 항쟁으로 분출한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뽑아야 한다는 열망을 담아 탄생한 현행 헌법은 한 세대 동안 민주주의 정착과 경제 성장의 뼈대로 기능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지탱하기엔 부족하다는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부작용이 커진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오명을 쓴 지 오래고 기본권 규정은 예상치 못한 영역에서 떠오른 새로운 권리를 품어 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20대 대통령 선출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아 있다.

리셋코리아 개헌분과 위원장인 이상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24일 중앙일보 사옥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에 새 시스템을 장착하지 않으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발전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행정·인권 전문가로 구성된 리셋코리아 개헌분과 위원 6인의 진단을 들어봤다.


“헌법은 국가의 내비게이션, 업그레이드할 때 됐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987년에 AI나 가상현실 같은 개념은 상상조차 못 하던 것인데 이제는 현실이 됐다. 저출산 문제, 기후위기도 마찬가지다”며 “현실 문제를 반영 못 하는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면 국가 경쟁력은 나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이 세계 최고 국가로 성장한 것은 패배 뒤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한 덕분이고 승전국 영국은 현실에 안주해 쇠락했다”고 지적했다.

리셋코리아 개헌분과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9월30일~10월6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웹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표집오차 ±3.1%포인트)에서 응답자의 66.5%가 ‘개헌에 찬성’하고, 63%는 ‘생명권·정보접근권·환경권 등 새로운 국민 기본권 확대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신필균 복지국가여성연대 대표는 “정보접근권은 스위스·핀란드 헌법, 독일 기본법,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에선 이미 보장하고 있다”며 “국민의 기본권 보장이란 헌법의 첫 번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길 많은 시민이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 세 번째)이 지난 6월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국민 행복 추구권 보장을 위한 기본권 개헌 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아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법은 정치의 내비게이션인데 이제 업그레이드할 때가 됐다”며 “이대로 두면 국가가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제자리를 빙빙 돌게 된다”고 말했다.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공공리더십연구실장은 “개헌을 통해 국가가 좋은 정치 제도를 갖게 되면 경제 성장률도 높아진다는 주장은 실증적 연구로도 입증된 사실”이라고 말했다.


“민주국가에서 권력이 집중되면 국민은 불행해진다”

6명의 위원들은 개헌이 가장 시급한 영역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로 표상되는 권력구조 부분을 꼽았다.

이상수 전 장관은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권력을 뺏기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 사회에 승자독식, 적대와 분열이 지배하는 구도가 자리 잡게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고, 선거법을 동시에 바꿔 한 지역구에서 1등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비례대표 의원수를 늘리고 정당 수뇌부가 공천권을 쥐고 이들의 독립적 정치 활동을 제한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리셋코리아 개헌 좌담회가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진행됐다. 이상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전성철 변호사(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대통령제의 한계를 지적했다. 전 변호사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역사적으로 강력한 대통령제를 유지해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없었다”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예외로 꼽히는 미국은 대통령제의 형식을 갖고 있지만 실질은 권력이 분산된 연방제 국가”라며 “한국은 국민들이 5.18과 6.10 항쟁으로 2번의 피를 흘리고도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는 특이한 경우”라고 말했다.

개헌분과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3.2%가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호했다. 권한을 대통령에게 몰아주는 현행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선호도는 14.7%에 그쳤지만 의원내각제에 대한 선호도 역시 19.8%에 불과했다. 전 변호사는 “한국엔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전파한 ‘남북 대치 상황에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아직도 굳게 자리잡고 있다”며 “내각제를 채택한 독일에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16년간 야당과 연정하면서도 강력한 국방력을 유지했다”고 덧붙였다.

헌법학자인 이기우·장영수 교수는 대통령 권력 분산의 핵심은 대통령의 입법부, 사법부 등에 대한 인사권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 교수는 “우리 정치가 자꾸 고장 나는 이유는 대통령이 3권을 넘어서 헌법재판소, 감사원 등 4,5권까지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대통령의 여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에 대한 영향력, 대법관·헌법재판소장 등에 대한 임명권을 해소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견제와 균형 원리가 작동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치 엘리트의 권한을 국민이 직접 견제할 수 없는 시스템도 현행 헌법의 문제로 지적됐다. 이 교수는 “엘리트 카르텔의 지대추구 행위를 견제하기 위해 국민소환, 국민투표, 국민발안 등 직접민주제의 요소를 헌법에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헌분과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국민발안제(63.0%), 중요 정책 결정에 대한 국민투표제(69.6%), 국민소환제(79.9%) 도입에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보였다.

이 교수는 “대의제를 완전히 대체하고 고대 아테네식 직접민주제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정치체제에 국민이 사용 가능한 통제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라며 “스위스는 1년에 10번 넘게 국민투표를 실시하지만 의회 역시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셋코리아 개헌분과 위원들의 제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개헌이 천지개벽이란 선입견부터 깨자”

전 변호사는 개헌을 성사시키기 위해선 “개헌이 천지개벽이라거나 ‘빅딜’이라고 여기는 국민 인식부터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국민이 헌법은 쉽게 자주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칠 필요성을 느껴도 엄두를 못 낸다”며 “미국이 1788년 헌법을 제정한 뒤 27차례나 개헌하며 문제를 보완한 사실 등 선진국의 개헌사를 국민에게 충분히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장 교수도 “이번 개헌 때 원하는 것을 담지 못하면 언제 또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매번 개헌 논의가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 갈등으로 치닫는다”며 “민감하게 충돌하는 것은 제쳐두고 당장 합의할 수 있고 시급한 것부터 단계적으로 고치는 개헌의 연성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리셋코리아 개헌 좌담회가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중앙일보에서 진행됐다.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위원들은 현행 헌법 체제에서 헌법개정안 발의권이 국회의원과 대통령에게만 있고 국민에겐 없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특정 정당 소속의 국회의원 이름으로 발의한 개헌안이 통과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유일하게 성사 가능성이 있는 발의권을 가진 건 대통령뿐이다”고 말했다.

은재호 박사는 “국민이 최종 단계에서 국민투표로 찬성 또는 반대에만 참여하는 개헌 방식은 한계가 있다”며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동의하면 개헌발의권을 부여하는 원포인트 개헌을 국회가 먼저 처리해 국민참여형 개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시민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해 민의를 모아 만든 개헌안을 정치권에 전달해 발의하도록 권고하는 방식도 가능하다”는 의견도 냈다.


“국회가 개헌절차법 만들고 차기 대통령이 이행”

급진적 개헌론자들은 10차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다음 해 3월9일 20대 대통령 선거와 함께 치르자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개헌분과 위원들은 “개헌 절차와 내용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때까지 개헌안을 마련하는 건 사실상 어렵다”고 진단했다.

위원들은 “차기 대통령이 개헌을 주도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위원들은 ‘새 정부 출범 첫해 대통령의 개헌 제안→개헌안 초안 마련→2023년 공론화 거친 수정안 발의’를 10차 개헌 로드맵으로 제시했다. 여기에 이 전 장관은 “여야가 다음 대선 전까지 10차 개헌의 절차, 방식, 시기 등을 합의해 법으로 먼저 정해놓고 차기 대통령이 당선된 뒤 이 절차법에 따라 개헌 이행을 강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헌법개정절차법을 미리 만들자는 주장이다.

전 변호사도 “여야 대선 후보들이 확정되면 차기 정부에서 개헌을 추진할 의지가 있는지 물어 모두 동의한다면 개헌절차법을 먼저 만들어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그래야 과거처럼 개헌론이 대선 국면에서 잠시 떠올랐다 금세 가라앉는 일의 반복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송승환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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