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읽기] 투쟁하는 것 같은 기분

2021. 10. 27. 00:2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장강명 소설가

‘괴작(怪作)’이라고 하는 영화들이 있다. 예산의 한계나 감독의 역량 부족으로 너무 못 만들어서 실소를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대중영화 문법을 벗어난 이런 작품들을 우리는 평소와 다른 태도로 감상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예술적 체험과 환기는 무척 소중하고 또 필요하다. 간혹 그런 작품이 시대를 훌쩍 앞선 명작으로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좀 악취미가 있어서, 20대에 그런 괴작들을 꽤 찾아봤더랬다. 개중 몇 편은 지금도 그리 나쁘지 않게 기억한다. 객석에서 비웃거나 치를 떠는 동안 취향과 개성도 쌓였을 것 같다. 걸작을 보며 한없는 감동에 젖을 때보다 졸작을 되새김질하면서 ‘뭐가 문제였을까’ 곱씹을 때 머리는 더 핑핑 돌아간다.

「 비전 아닌 감흥 집중하는 세상
감성 구호들의 씁쓸한 진부함
갈수록 흔해지는 정치인 눈물

그런데 살면서 본 가장 괴상한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남들은 명작이라고 하는 작품을 대겠다. 2012년에 나온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다. 이 영화 참 이상하지 않나? 영미권 배우들이 프랑스 사람인 척하면서 영어로 노래하고, 전용기를 타고 다닐 듯한 할리우드 슈퍼스타들이 가난한 민중의 분노를 외친다. 영화 전체가 거대한 농담 같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서 팡틴은 앞니가 아니라 미모에 영향을 주지 않을 어금니를 뽑는다. 소년 가브로슈는 루소와 볼테르를 탓하는 장난스러운 내용이 아니라 ‘민중의 노래가 들리는가’라는 비장한 가사의 곡을 부른다. 소설에서 요정처럼 시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탄약을 줍다 죽는 가브로슈의 묘사는 압도적이다. 영화 속 소년의 죽음은 오글거렸다.

제작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며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법정에서 느꼈다는 감정을 맛봤다. 상대는 굉장히 위엄 있는 존재인 척 구는데, 내 눈엔 그 모습이 너무 진부했다. 정말 민중의 함성을 말하는 영화인가? 아니면 우리가 익히 알고 보아온, 대중영화 문법에 충실한 시청각 스펙터클이 이 작품의 진짜 메시지인가.

‘레미제라블’은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 한국 극장에서 상영됐다. 누적 관객 수는 591만 명.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던 이들은 이 흥행에 ‘신드롬’이라는 말을 붙이며 분석 기사와 평론을 썼다. 경향신문은 두 면을 할애했다. 참고로 2012년에 ‘도둑들’을 극장에서 본 사람은 1298만 명, 2013년 ‘7번방의 선물’은 1281만 명이다.

분석 기사들의 주장처럼 관객들이 영화 ‘레미제라블’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했을까? 나는 관객 대부분이 얻은 것은 ‘투쟁하는 듯한 막연한 기분’이었고, 제작진의 의도도 그것이었다고 본다. 나이키 운동화가 ‘운동하는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듯이. 그런 관점에서는 ‘트랜스포머’보다 정치적으로 더 유해한 영화다. 감흥으로 현실 인식을 흐린다.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이 극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낀 게. 사람들이 지루하고 불편하더라도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걸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하는 대신 그저 ‘투쟁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만족하는 듯 보인 게. 그즈음부터 슬프다고, 혹은 감격했다고 눈물 흘리는 정치인도 부쩍 늘어난 것 같다. 그들은 몹시 진부하게 울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2016년의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다. 법안 표결을 막겠다고 야당 의원들이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국회 본회의장에서 긴 연설을 했다. 몇몇 의원들은 말하며 울었다. 얼마 뒤 그들은 집권했고, 한국 헌정사에서 역대 최다 의석을 차지한 거대 정당도 되었다.

그런데 테러방지법은 그대로다. ‘위치정보사업자’를 ‘개인위치정보사업자 및 사물위치정보사업자’로 바꾸는 식의 소소한 문구 수정만 있었을 뿐이다. 얼마든지 고치고 폐지할 수 있는데, 정부 여당에 그럴 의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정권을 잡고 나니 괜찮은 법으로 보이나 보지?

한국 정치인들의 태세 전환이야 흔한 일인데, 소셜미디어에서 테러방지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필리버스터를 온갖 감성 문구로 응원했던 수많은 네티즌도 조용하다. 그리고 나는 이 대목에서, 정말 중요했던 건 ‘투쟁하는 것 같은 기분’ 아니었나 의심한다. 어쩌겠나. 감흥은 바람과 같고, 거기에 의존하는 동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엠마 골드만이 했다고 알려진 말이다. 한 세기가 지나 자본주의와 직업 정치인들은 영리해졌다. 이제 그들은 거대한 농담을 기획하고 연출한다. 그 노래가 들리는가. “너를 춤추게 해줄게. 혁명인 것처럼.”

장강명 소설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