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사태 42주년 날, 군사반란 2인자 노태우 떠나다

이경태 2021. 10. 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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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고] 정치군인, '보통사람', 그리고 '물태우'.. 말년에 전두환과 다른 행보

[이경태 기자]

 1990년 10월 13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건전시민운동 단체대표들로부터 수범사례 발표와 건의를 듣고 범죄와 폭력을 소탕하기위한 강력한 실천방안을 천명했다.
ⓒ 연합뉴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씨가 26일 숨을 거뒀다. 향년 89세.

1987년 6월 항쟁 이후 직선제로 선출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전두환씨와 함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해 5공화국을 탄생시킨 주역이다.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쏟아진 민주화의 열망을 가로막으며 군부독재를 연장시킨 책임자 중 한 명인 그가 42년 뒤인 2021년 10월 26일 숨을 거둔 점이 공교롭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대부분 박탈된 상태다. 노씨는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1995년 전두환씨와 함께 구속 기소돼 반란수괴 등에 관한 판결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 원을 선고받았다. 이에 따라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사회적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그는 법률상 국립묘지에는 묻힐 수 없다.

노태우씨는 지난 2002년 전립선암 수술 이후 20년 가까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오랜 투병생활을 해왔다. 김연수 서울대병원장은 26일 오후 기자회견에서 "고인(노태우)께서는 다계통 위축증으로 투병하시며 반복적인 폐렴과 봉와직염 등으로 수차례 병원에 입원하셨고 심부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를 지속하셨다"며 "최근엔 서울대병원 재택의료 돌봄 하에 자택에 지내시다 하루 전부터 저산소증·저혈압을 보여 금일 오후 12시 45분경 응급실을 방문,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오후 1시 45분 서거하셨다"고 밝혔다.

[정치군인의 길] '육사동기' 전두환과 12.12 군사반란 주도
 
 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 자료사진
 
▲ 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 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연합뉴스
 
그의 이름이 현대 정치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엔 육군사관학교 시절을 빼놓을 수 없다. 육사 11기인 노태우씨는 전두환씨를 육사 동기로 만나 같은 방을 썼다. 이후 두 사람은 그의 동기들과 함께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하면서 정치군인의 길을 걸었다. 12.12 군사반란의 주역도 육사 11기, 12기생들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구성원들이었다.

1981년 21대 국군보안사령관을 끝으로 예편(대장)한 노씨는 같은 해 안보·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정무2장관에 임명됐다. 이후 체육부·내무부 장관을 거쳐 1985년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당대표로 임명됐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노씨는 당시 민정당 대선후보 자격으로 대통령 직선제 요구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또 이러한 요구를 청와대에서 수용하지 않는다면 당대표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6.29 선언은 전두환씨 등과의 협의를 거친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 양김 분열로 최저 득표율 대통령 당선, 3당 합당의 주역
 
▲ 3당 합당 발표한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 전직 대통령 노태우씨가 26일 사망했다. 사진은 1990년 1월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 연합뉴스
 
1987년 12월 16일, 노씨는 36.64%의 득표율로 13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역대 대선 최저 득표율 당선자다.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야권 지지층의 표가 분산된 덕이 컸다.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득표율은 28.03%,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득표율은 27.04%였다. 대선 당시 자신을 "보통 사람"으로 강조하는 이미지 메이킹으로 군부정권에 대한 거부감을 반감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노씨는 1988년 4월 총선 결과로 만들어진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90년 1월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통합하는 '3당 합당'을 성공시킨 것도 현대 정치사의 주요한 변곡 지점이다. 당시 3당 합당을 통해 출범한 민주자유당은 현재 국민의힘의 전신이다. 또 대구·경북(노태우)과 부산·경남(김영삼), 충청(김종필)을 하나로 묶으면서 1987년 민주화 이후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지역주의 정치의 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대통령 재임 시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탄압, 국군보안사령부 민간인 사찰 사건, '분신 정국' 등의 반정부 민주화 시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 많은 시국사건들이 벌어졌다. 퇴임 직후엔 재벌 총수 등 40여 명의 기업인으로부터 3400억~3500억 원의 비자금을 수수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로 인해 노태우씨는 헌정 사상 구속된 첫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1991년 5월 25일 오후 5시 30분께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인근 미쉘레스토랑 앞에서 경찰이 토끼몰이 진압을 하고 있다. 한 사복체포조(일명 백골단)가 미처 피하지 못한 대학생들의 등에 올라타 발로 밟고 있다. 이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성균관대 김귀정씨가 사망했다. 사진은 당시 고대신문 사진기자가 촬영.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재임] 끊이지 않은 시국사건, 수많은 젊은이들 분신... 비자금 수수도

그러나 긍정적 평가도 있다. 13대 국회의원 총선으로 여소야대 국회가 꾸려졌을 때, 노씨는 '물태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낮은 자세로 야권과의 '협치'를 적극 시도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의 별명에 대한 질문에 "나의 신조는 '참 용기'다.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성과는 나왔다. 노씨는 당시 집권여당의 총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에게 국회 협상 전권을 부여했고,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야당 총재들을 자주 만났다. 13대 국회는 이를 통해 백담사로 떠났던 전두환씨를 증인으로 출석시킨 '5공화국 청문회'나 지방자치법 제정, 국정감사제도 부활 등을 성공시켰다.

진보 정치학자로 꼽히는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는 노씨에 대해 "군사독재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토지공개념이라는 역대 가장 진보적인 경제정책을 만든 것은 높이 평가한다(2017년 12월 <경향신문> 인터뷰 중)"라고 말하기도 했다. 노씨가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등 이른바 '토지공개념 3법'을 추진한 점을 짚은 것이다. '경제민주화 전도사'인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당시 경제수석)을 통해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신규취득 금지조치, 이른바 '5.8조치' 역시 이 시기 이뤄졌다.

외교·안보 분야에선 러시아(구소련)·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의 '북방정책'이 세계적인 냉전 체제 해체 흐름에 부응한 것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대북 정책도 마찬가지다. 노씨는 1988년 7.7 선언을 통해 "민족통합은 우리의 책임 아래 우리의 자주적 역량으로 이루어야 한다"라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당사자 해결 원칙'을 제시했다. 또 1991년 12월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도 타결했다. 이는 이후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과 노무현 정부의 10.4 선언의 기초가 됐다. 그 다음해인 1992년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했다.

퇴임 이후 노씨의 삶을 옭아맨 것은 앞서 밝혔던 정치군인으로 걸었던 길이었다. 후임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노씨의 출발점이었던 '하나회'를 숙청했다. 1995년엔 전두환씨와 함께 그를 12.12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세웠다. 1997년 선고가 확정됐지만, 같은 해 12월 사면 받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오전 크램린궁내 소연방 최고인민회의 회의실에서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미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후 6개월만에 제2차 정상회담을 가졌을 당시 모습.
ⓒ 연합뉴스
 
[명과 암] 북방외교·남북기본합의서 채택 등 재평가... 5.18 사과와 추징금 완납 등 전두환과 다른 행보

1997년 대법원 판결 이후 행보는 전두환씨와 대비된다.

그 역시 오랫동안 2688억 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미납했다는 지적을 받았으나 2013년 9월 사실상 완납했다. 반면, 전두환씨는 지금도 추징금 966억 원을 미납한 상태다. 2019년엔 수년째 지방세를 체납하고 있단 사실도 알려졌고 같은 해 12.12 군사반란 주역들과 오찬을 하고 골프 라운딩을 하는 모습이 드러나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특히 전씨는 당시 본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주장하던 시기였다.

5.18 광주에 대한 인식 차도 있다. 전씨는 2017년 펴낸 자신의 자서전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의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중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도 5.18 관련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씨는 아들 노재현씨를 통해 꾸준히 광주에 대한 사죄 의사를 표해 왔다. 노재현씨는 부친의 뜻이라며 지난 2019년부터 총 다섯 차례 광주를 방문했는데, 지난 4월엔 노태우씨의 이름으로 국립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고, 5.18 희생자 유족들을 만나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5년 12월 18일 오전 1차공판을 받기위해 서초동 서울지방법원에 도착, 입감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고 노태우 약력

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현 대구 동구) 출생.
1946년 대구 공산소학교(현 공산초등학교) 졸업
1951년 경북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졸업
1955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
1956년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 발령
1959년 결혼
1960년 군사정보대학 영어번역담당 장교
1961년 전두환 등과 함께 '5.16 군사혁명 지지 행진' 참가
1966년 국군 방첩부대 방첩과장
1967년 베트남 전쟁 참전(맹호사단 1연대 3대대장)
1968년 육군대학 수료 및 수도경비사단 대대장 부임
1970년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
1971년 보병 연대장
1974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
1976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행정차장보
1978년 청와대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 육군 제9보병 사단장
1979년 12.12 군사반란 주도
1980년 5월 수도경비사령관 및 국가보위입법위원회 상임위원
1980년 8월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1981년 7월 예비역 대장으로 예편 및 정무 제2장관 임명
1982년 체육부 장관 및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1985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및 당 대표위원 임명
1987년 6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을 골자로 한 '6.29 선언' 발표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통령 선거 승리
1988년 2월 25일 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이른바 '7.7 선언' 발표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 개최
1988년 11월 일해재단 비리 등 '5공화국 비리 청문회'
1989년 2월 1일 헝가리와 공식 수교
1989년 9월 11일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발표
1989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 '5공화국 청문회' 증인 출석
1990년 1월 22일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발표
1990년 10월 1일 소련(현 러시아)과 공식 수교
1991년 3월 31년 만의 지방선거 부활
1991년 9월 남북 UN 동시가입
1991년 12월 13일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의 '남북기본합의서' 합의
1992년 1월 31일 남북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1992년 8월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 수교
1992년 9월 민주자유당 탈당. 대선 전 대통령의 여당 탈당 첫 선례
1993년 2월 대통령 퇴임
1995년 11월 16일 12.12 군사반란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
1997년 4월 대법원 선고, 징역 17년-추징금 2688억 원
1997년 12월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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