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열어주는 '십자가의 길' 쉼없는 전진을

2021. 10. 26.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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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이 교회에 던진 질문.. "어떤 규칙있나"
한국교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포스터.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책에서 열 달간의 아우슈비츠 제3 수용소 생활을 토대로 그가 마주한 극한의 폭력과 이에 맞서는 인간 생명의 가치에 대하여 절규한 바 있다. 어차피 생존확률은 거의 제로, 그러나 수용소 허드렛일에 필요한 기능인들과 나치와 친분이 있는 아주 극소수의 유대인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프리모 레비가 주목한 ‘인간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오로지 자기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기적인 사람들만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456억의 상금을 걸고 펼쳐지는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에서 프리모 레비를 떠올리게 된 것은 우연일까? 생존의 서바이벌 게임에서 과연 누가 최후까지 살아남게 될 것인지 질문하며 필자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 사회에 소리 없이 퍼져가는 독가스와 같은 절망을 보았다.

‘오징어 게임’에서 ‘딱지치기’는 이미 판이 짜인 기층 사회에 딴지를 걸어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딱지를 내리치며 ‘한판 뒤집기’를 꿈꾸지만 정작 돌아오는 것은 반복되는 ‘귀싸대기’, 결국 십만 원에 얼얼한 자존심을 팔아먹고 일방적으로 정해진 게임의 세계로 인간의 영혼은 무모하게 돌진한다. 그러나 애당초 이 게임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사람 이름이 없다.

다만 번호만 있을 뿐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맘모니즘(mammonism. 돈 귀신)’의 위력 앞에 456개의 몸뚱이는 이내 물건처럼 소비될 운명에 처에게 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들키면 죽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 세계를 통제하는 ‘빅 브라더(Big Brother)’의 눈을 피할 길은 만만치 않다. 조금이라도 나아가려고 하는 시도는 오히려 욕망일 뿐, 멈출 때 멈추지 못하고 들켜버린 육신은 속절없이 널려있는 주검이 된다.

‘달고나’에서는 핥아서라도 원하는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여야 살 수 있는 폭거를 보게 된다. 각자에게 주어진 별, 동그라미, 세모, 그리고 우산 모양의 달고나는 출발부터 불공정한 게임이다. 어떤 것을 뽑아야 유리한지는 소수의 비밀로 유지된다. 그러나 승자독식의 게임에서는 피붙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살기 위하여 적에게 절대 정보를 노출하면 안 된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비정한 현실 사회에서 가끔 누군가가 나의 구슬 친구인 ‘깐부(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선의의 ‘깐부’를 향한 악어의 눈물도 잠시 잠깐, 살기 위하여서는 송두리째 삼켜야 한다. 그래서 꼼수만이 최후 승리의 비결이다. 정상적인 것은 패자들을 위한 추억이 되고 비정상적인 것은 현실의 표준이 된다.

“뭉쳐야 산다”라는 ‘줄다리기’ 게임에서는 적과 아군을 나누어 매일 벌어지는 사회 내 수많은 조직 간의 총성 없는 전쟁을 상기시킨다. 이기기 위하여 동료를 선택할 때는 우선 힘의 논리가 득세한다. 윤리와 도덕은 필요 없다. 비도덕적 사회에서 도덕적인 인간을 선택할 이유는 없다. 무조건 이기고 보는 것이다.

하루하루 내딛는 인생의 걸음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생사를 넘나드는 ‘징검다리’로 다가오고 있다. 누군가 나 대신 먼저 죽어줘야지만 생존의 확률은 높아진다. 무조건 앞서간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남의 실패와 좌절은 오히려 나에게 득이 된다. 때로는 그냥 지켜보는 것이 상책이다. 어차피 그 희생자는 굳이 나일 필요는 없다. 때론 속절없는 시간이 애매한 답이다.

결국, 내 영역 ‘오징어’ 안에 들어온 이는 무조건 밖으로 밀어내야만 한다. 최후 나 자신과 내가 지킨 ‘오징어’ 영역만이 남아야 한다. 그 안에서 나는 왕이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여야 한다. 이는 경쟁 사회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비치는 오늘날 개신교의 자화상은 더욱더 가슴을 후빈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영화 ‘밀양(2007)’과 ‘도가니(2011)’에 나오는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244 번호의 생존자는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타인들을 몰살시키고 극적으로 생존한 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반쪽짜리 기도를 한다.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에 대한 자책은 ‘생략’된다. 240 번호의 아버지는 목사로서 회개만 하면 그 어떤 죄든지 용서된다고 담대히 설파한다. ‘회개의 생략’도 모자라 앞으로 지을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준비가 되어 있기에 더 큰 죄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거리의 전도자에게는 전혀 타인에 대한 공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오늘날 미디어가 고발하는 기독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 희망의 가능성도 추스려본다. ‘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을 쓴 네덜란드 사회학자 하위징아는 게임이 즐거운 이유는 “규칙을 지키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딱지치기의 원리’는 쳐서 뒤집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놀이는 그 한두 가지 원리를 끝까지 지킬 때 놀이 기쁨을 증가시킨다. 하위징아의 주된 관심은 “왜 성인사회에서 그 규칙은 깨지는가?”에 있었다. 규칙이 깨지기 시작할 때 공동체는 무너진다. 꼼수가 시작될 때 인간성은 상실된다.

그래서 다시 규칙을 세우려는 노력이 시작될 때 미래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우리는 게임의 즐거움이 비극으로 끝나는 절망을 보았다면 역설적으로 진정한 게임의 기쁨을 원한다면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 아닐까? 이 노력에 교회와 크리스천이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누구나 하기 싫은 것을 내가 먼저 하면 된다.” 이것이 황금률이 아닐까?

‘오징어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다른 희망은 ‘하나 더하기’ 원리이다. 실제 이 게임에 적응하지 못한 ‘모난 하나’들은 차례로 ‘뺄셈’의 공식으로 사라진다.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은 이들은 다 삭제된다. 이제 최후 남은 승자에게 필요한 것은 ‘덧셈의 원리’를 작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최후 남은 생존자는 정작 자기를 그 지경으로 몰아간 대상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게 된다. 이 또한 ‘하나 빼기’의 생존 전략과 다름이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 결말을 예상케 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을 희구한다면 생존 전략을 속히 바꾸어야 한다. 그것은 모난 하나들이 뭉쳐 상생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하나 빼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더 무엇을 망설이는가? 부지런히 나와 같은 하나를 찾아내어 더 큰 하나를 만들어가는 규칙을 세워나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징어 게임’의 드라마 성격과 전혀 맞지 않는 질문을 하나 해본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456명에게 1억씩 나누어주어 새 출발을 장려할 수 없었는가? 맘모니즘 대신 휴머니즘은 기대할 수 없는가? 승자의 ‘히스토리(history)’가 아니라 약자의 ‘히스테리(histery)’에 귀 기울일 수는 없는가? 아니 ‘허스토리(herstory)’는 안될 이유가 없지는 않은가?

종교개혁 504주년의 해를 맞이하며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만인 사제설’을 떠올려 본다. 그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사제가 되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사제가 되어 함께 나아가야 할 책임을 잊지 않았다. 이 시대 교회의 진정한 사명은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에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독설처럼 들리는 교회에 대한 메시지는 오히려 바람직한 교회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염원이라고 받아들이면 된다. 지금도 수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또 다른 457 번호의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 그에게 살 희망을 주어야 한다. 아니 456 번호로 게임은 중지되어야 한다.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만일 그러고도 더 깨달음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쩌면 역사 속에 던져진 똑같은 질문을 곱씹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유경동 감리교신학대 기독교 윤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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