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 성공→소련·중국과 수교→남북 동시 유엔가입[노태우 별세]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은 세계사의 전환기였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84년 LA 올림픽은 반쪽으로 치러졌다. 모스크바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LA에는 소련 등 동구 국가들이 불참했다. 냉전이 큰 고비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 서울올림픽에는 양 진영의 160개국이 모두 참가했다. 냉전 종식을 알리는 축제가 된 셈이다.
그 이듬해(89년) 6월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다시 넉 달 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1년 10월 소련연방이 해체됐다. 냉전의 한 축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다. 고조되던 동서 긴장은 1950년 한국 전쟁으로 폭발했다. 38년 뒤 그곳에서 동서 화합의 올림픽이 열렸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 외교 집념과 맞물려 한반도에도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헝가리 등 비동맹국가와 수교
특히 서울 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못사는 나라라는 편견을 떨쳤다. 경제가 무너진 사회주의 국가들은 협력 파트너가 필요했다. 북한보다 한국에 눈을 돌렸다. TV를 통해 전해진 서울의 발전상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드문 성공 케이스다. 개발독재 전략도 정치적 민주화에 부담을 느끼는 사회주의 국가에 매력적이었다.
올림픽 참여를 독려하는 빈번한 접촉이 비밀 대화 기회를 제공했다. 가장 먼저 수교한 헝가리도 팔 슈미트 IOC 위원이 크게 역할을 했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두 차례나 반쪽 올림픽을 치른 뒤였기 때문이다.
7·7 선언 통한 남북 수교 추진 공식화
가장 먼저 문을 연 것은 헝가리다. 88년 8월 26일 대사급 상주대표부 개설에 합의하고, 이듬해 2월 1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89년 11월 1일 폴란드가 뒤를 이어 수교했다. 이후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엔 한층 속도가 붙었다. 1989년 12월 유고슬라비아와 수교를 맺은 이후 체코슬로바키아(90년 3월), 불가리아(90년 3월), 몽골(90년 3월), 소련(90년 9월), 알바니아(91년 8월), 중국(92년 8월) 등 공산권과의 수교가 쓰나미처럼 이루어졌다.
북한, 남북 고위급회담 받아들여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88년 11월 한국이 극동지역에서 유망한 경제 파트너라는 카멘체프 부총리의 보고를 채택했다. 89년 11월 영사처 설치에 합의하고, 90년 9월 30일 수교했다. 86 서울 아시안게임, 88 서울 올림픽, 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을 계기로 비밀접촉을 이어온 중국은 92년 8월 22일 수교했다.
한국은 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1989년 9월 여소야대(與小野大)에서 야당의 3김 총재와 협의해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이홍구 통일원장관이 2년 동안 매달 2번씩 야당 총재들을 찾아가 다듬은 결과다.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거리도 좁혔다. 덕분에 이 통일 방안은 아직도 우리 기조로 남았다.
서울올림픽의 성공, 베를린 장벽 붕괴, 한국과 소련·중국 등 공산권의 잇따른 수교는 북한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북한도 남북 총리 사이의 고위급 회담을 받아들였다. 91년에는 유엔 동시 가입에 따라왔다. 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남북 양측이 처음으로 상대의 실체를 인정한 공식 문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