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은 목소리 테러 "악마는 얼굴도 이름도 없다"
[김재호 기자]
올 하반기 한국영화는 <보이스>(김곡·김선 감독, 변요한·김무열)가 단연 화제다. <보이스>는 25일 기준, 누적 관객수 138만 명을 기록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타격을 입은 한국영화 시장에서 이 기록은 마른 하늘에 단비와 같다. <보이스>는 한국영화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중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 보이스피싱 범죄의 온상을 적나라게 드러낸 김 곡 감독 |
ⓒ 김재호 |
지난 24일 인터뷰한 김 곡 감독은 "보이스피싱은 아주 잘 진화된 묻지마 범죄"라며 "(점)조직적으로 기획되고 실행된다는 점에서 과거 범죄와 흡사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공격한다는 점에서 영락없는 현대 범죄"라고 설명했다. 그는 보이스피싱을 "목소리로만 이루어지는 테러"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그토록 보이스피싱이 늘어나는 이유는 뭘까? 김 감독은 "무엇보다도 비대면 소통방식의 발달이 주 원인"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보이스피싱은 비대면 소통에 대한 신뢰를 파고드는 범죄"라며 "보인다면 믿거나 믿지 않거나를 우린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면 우린 이제 믿지 않고선 못 배긴다"라고 강조했다.
비대면이 불러온 현대사회 범죄 '보이스피싱'
'메타버스'가 유행하고 디지털 노마드족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소통이 시대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다. 아니, 인터넷과 SNS 등 통신기술의 발단은 생존의 기술로 자리잡았다. 김 감독은 "심지어 현실 속 소통보다는 가상 속의 보이지 않는 소통을 더 신뢰하는 경향이 생겨났다"라며 "바로 옆방에 있는 엄마의 말보다 본명도 모를 SNS 친구의 피드를 더 신뢰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라고 비판했다.
▲ 영화 <보이스> 포스터 |
ⓒ 수필름 |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을 조사하면서 가장 마음이 쓰인 사연이 있었는지 물었다. 김 감독은 "모든 피해사례들이 끔찍하다"라며 "중소기업을 상대로 원자재 가격을 속여 한 번에 몇 억씩 터는 사례, 판검사 등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는 사례 등 상상을 초월한 사례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피해자들의 심리적 자책이 너무 크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보이지도 않는 누군가를 신뢰했다는 데에 대한 자책감이다. 최악의 경우, 자살로도 이어진다"고 우려했다. 김 감독의 표현에 따르면, 보이스피싱은 "영혼을 조종당했다"는 자괴감이 크다.
심리적 자책으로 자칫하면 자살로까지 이어져
영화 속 주인공인 서준(변요한)은 피해자로서 영화 내내 어둡고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곽프로(김무열)는 가해자로서 유쾌하고 심지어 생기 있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의외이면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가해자들이 갖고 있는 쾌락같은 게 보였다. 그들이 현실을 지옥으로 규정하며 즐기는 모습은 곽프로(김무열) 자신이 지옥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한 설정일까? 아니면 가해자들이 갖고 있는 본성이라고 봐야 하나?
김 감독은 "실제로 보이스피싱 콜센터 직원들은 하루 종일 모르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동일한 대본을 수십 수백 번씩 읽는다"라며 "하나 걸리면 땡큐고 아니면 마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다보니 피해자의 감정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김 감독은 "무감각은 지루함을 부르고, 지루함은 악을 부추긴다"라고 꼬집었다.
▲ 영화 <보이스>를 각색하고 연출한 김 곡 감독 |
ⓒ 김재호 |
보이스피싱의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작업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 게 영화 <보이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예 작정을 하고 그들의 은밀한 작업 체계를 까발렸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은 또 다른 점조직이 탄생하는 걸 내비친다. 나뭇 가지보다는 악의 뿌리가 뽑혀야만 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악의 뿌리가 뽑힐 수 있을까?
김 감독은 "과거의 악은 뿌리로부터 가지가 뻗어나가는 식이었다"며 "그러나 현대의 악은 거꾸로 가지가 뿌리를 만들어낸다"라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악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현대가 당면한 문제는 이제 악마는 얼굴도 이름도 없다는 데에 있다. 현대의 악마는 얼굴도 이름도 없는 링크(전화선)를 따라 자라난다는 데에 있다."
뿌리 뽑을 수 없는 점조직이 늘어난다
한편, 영화 <보이스>의 연출이 돋보인다. 싸움나 도망, 사기치는 장면 등이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연출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건 무엇일까? 김 감독은 "연출의 모든 주안점은 '리얼리티'였다"며 "현재에도 진행 중인 범죄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그저 장르적 상상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에서 소개되는 보이스피싱 수법은 모두 실제 사례들"이라며 "하물며 격투씬마저도 화려한 무술이 아니라, 현실에서 있을법한 '개싸움'처럼 연출되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김 감독은 "장르적 상상은 최소화하여 영화 전체가 리얼리티에 근거하길 원했다"라고 답했다. 다만, 장르적 상상력을 가미한 부분이 있다면, 액션씬에 자주 등장하는 케이블과 전화선이다. 김 감독은 "전화선을 통해 이루어지는 범죄인만큼, 액션도 전화선과 얽히고설킨 채로 보여주고 싶었다"라며 "대표적인 장면이 케이블에 매달린 채로 진행되는 엘리베이터 샤프트 격투 신"이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앞으로 어떤 영화 작업을 펼칠까? 그는 "보이스피싱 범죄자들이 기존 범죄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단지 폭력배가 아니라 상황연출가라는 점"이라며 많은 피해자들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당했다고 진술한다"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상황을 연출하여 주체를 조종한다는 것은, 보이스피싱뿐만 아니라 현대악의 특질이자 캐릭터"라며 "꼭 타인이 아니더라도 이제 우린 자기계발서에 코를 파묻고 스스로를 조종하기도 한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는 곡사(김 곡)의 끈질긴 주제다"라고 밝혔다.
몇몇 주목받는 작품을 빼곤 한국영화가 침체기 속에 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철학이 확고한 영화 감독과 그의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영화 본연의 역할과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김 곡 감독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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