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시대 통신재난, 삶이 85분 동안 멈췄다
37분. 초등학교 1교시 수업시간(40분)도 안 된다.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일상’이 멈춰버렸다. 택시요금이나 식사대금 결제는 물론 코로나19 방역이나 분초를 다투는 119 상황실도 혼란을 겪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비대면이 일상화돼 있어 피해는 더 컸다.
25일 오전 11시20분쯤부터 37분여간 KT의 네트워크 장애로 유·무선 인터넷이 끊어졌다. 원격수업을 하던 전국 초·중·고교의 수업이 중단됐고, 점심 장사가 한창이어야 할 음식점에선 신용카드가 결제되지 않았다. 증권 거래 등 일부 금융 업무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 짧은 시간에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의 취약점이 드러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KT에 따르면 이날 오전 11시20분쯤 발생한 KT의 유·무선 통신망 장애는 11시57분부터 차츰 복구돼 1시간25분 뒤인 낮 12시45분쯤 100% 복구됐다. 통신 장애는 서울·수도권을 포함해 강원·제주 등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
KT는 유선통신 시장에서 41%(가입자 940만 명), 무선에서 24%(1700만 명)의 시장 점유율을 갖고 있다. 가입자를 산술적으로 더하면 2600만여 명이 넘는다. 지역에 따라 37분에서 최장 85분가량 전 국민 46%의 ‘디지털 손발’이 묶인 셈이다.
직장인 김모(30)씨는 “아무런 안내도 없어 휴대폰이 고장 난 줄 알고 다섯 번이나 껐다가 켰다”며 “오늘 대출 이자를 송금하는 날이라 진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경기도에서 학교 등에 식자재 공급을 하는 윤모(36)씨는 이날 전산망 오류로 이날까지인 입찰 기한에 맞추지 못해 3000만원 상당의 계약을 놓쳤다. 윤씨는 “이 손실 보상을 어디에 따져야 할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119 종합상황실도 속을 태웠다. 충북소방본부 관계자는 “KT 기지국 회선을 사용하는 일반전화나 휴대전화 119 신고가 11시28분부터 20분 정도 연결되지 않아 다른 회선으로 신고 접수를 받았다”고 말했다.
비대면이 보편화하면서 피해 규모는 더 커진 것으로 보인다.
카드결제·원격수업 먹통 … 세계바둑대회 대국도 중단
경기도의 한 대학교에서 문화콘텐트 관련 학과 수업을 하는 정모(42) 교수는 이날 오전 11시부터 온라인 시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20분 뒤부터 전산에 조금씩 문제가 생기는 것 같더니 상당수 학생의 접속이 끊어졌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정 교수는 시험을 중단했다. 교육부는 이날 장애로 학교와 유치원 등 교육기관 7742곳이 연결 장애를 겪었다고 밝혔다.
배달 주문을 받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배달 전문 파스타 매장을 운영 중인 B씨는 “배달의 민족, 쿠팡이츠 등이 먹통이 됐고, 전화로 주문을 받아도 라이더 배치가 안 됐다. 점심 장사를 망쳤다”며 울상을 지었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필수적인 QR코드 인증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식당가에서는 혼잡이 빚어졌다.
전국 학교·유치원 7742곳 연결 장애
여신협회에 따르면 이날 정오부터 오후 1시까지 신용카드 승인 건수가 평소 대비 30~40%가량 줄었다. 카드 결제가 되지 않자 현금이 없던 시민들이 ATM(현금자동인출기)으로 몰려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통신망 장애의 여파로 2021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 첫날 두 경기도 취소됐다. 2021 삼성화재배는 코로나19로 한국과 중국 간 온라인 대국으로 진행 중이었다.
KT는 이날 장애 발생 원인을 두고도 말을 바꿔 혼란을 키웠다. 사고 발생 직후 KT는 원인을 디도스(DDoS·악성코드를 이용한 서비스 거부) 공격으로 추정했다가 약 2시간 반 뒤 “네트워크 경로 설정 오류(라우팅 오류)가 원인”이라고 정정했다. KT 관계자는 “초기엔 트래픽 과부하가 발생한 현상을 보고 디도스 공격을 받았다고 판단했는데, 분석 결과 라우팅 오류로 밝혀졌다”며 “이렇게 대대적으로 라우팅 장애가 발생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라우팅이란 데이터가 네트워크의 중앙부에서 사용자한테 도달할 때까지 가장 효율적인 통로를 찾아주는 작업이다. 트래픽이 다니는 길목의 ‘신호등’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신호등이 고장 나 특정 차선이 계속 막히면서 과부하가 발생한 것이다.
과부하가 발생하거나 주회선에 문제가 생겼을 때 보조수단으로 백업망이 가동한다. 하지만 이날은 백업망이 작동하지 않았다. 익명을 원한 정보기술(IT) 서비스 업계 관계자는 “장애가 날 수는 있지만 백업망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며 “KT 망을 이용하는 서비스 업체의 망 이중화가 갖춰지지 않아 피해가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KT는 아현지국 화재 사고 이후 3년 만에 또다시 대규모 네트워크 장애가 발생했다. 2018년 11월 24일 발생한 KT 아현지사 화재로 서울 중구·용산구·서대문구·마포구와 경기도 고양시 일부에서 유·무선 전화와 인터넷이 멈췄다. 장애를 복구하는 데 길게는 일주일 이상 걸렸다. 당시 KT가 추산한 물적 피해 규모는 470억원이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관리 실패에 따른 기술적 오류라면 큰 문제인 데다, 내부 원인을 찾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리는 것 역시 심각한 상황”이라며 “기간통신사업자의 취약점이 불순 세력에 노출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인호 고려대 컴퓨터학과 교수 역시 “37분은 불이 났다거나 범죄와 연관됐다면 사람이 숨질 수도 있는 상당히 긴 시간”이라며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초연결 사회의 취약성을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e메일과 휴대전화, 전자상거래, 사물인터넷 등 네트워크로 촘촘하게 엮인 기술 의존적인 사회일수록 재난에 취약할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 과학자 존 L 캐스티는 현대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미지의 사건을 ‘X사건’이라고 칭하며, 그중 하나로 ‘디지털 암흑’을 꼽았다. 실제로 2018년 12월 통신장비업체 에릭슨의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일본·영국 등 11개국의 통신 시스템이 마비돼 8000만여 명이 약 4시간 ‘먹통’ 현상을 겪었다.
“초연결 사회 취약점 그대로 드러나”
박병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사태가 X사건인지, 일시적으로 발생한 ‘딸꾹질(hiccup) 사건’인지 짚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X사건으로 판단된다면 통신망뿐만 아니라 전기·수도·에너지 등 네트워크로 된 기간망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KT는 위기관리위원회를 가동해 자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과기정통부 등 유관기관도 사고 원인 조사에 들어갔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조사 결과에 따라 보상을 어떻게 할지는 물론 재발 방지 대책 등 후속 조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KT의 현재 약관은 고객 책임 없이 연속 3시간 이상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거나, 1개월 동안 누적 6시간 이상 서비스가 중단되면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은경·권유진·권혜림·최종권 기자 choi.eun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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