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 맡고 손잡을 수 있는 곳으로.." 노회찬을 기억하는 법

김벼리 2021. 10. 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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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노회찬 6411> 그를 기억하는 정치

[김벼리 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노회찬 6411> 메인 포스터
ⓒ 시네마6411
 
인물에 대한 내 감정과는 별개로, 동시대를 산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혹은 평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안 끌린다고 해야 할까, 정리된 내용을 통해 오히려 그 대상이 납작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그게 정치인이라면,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라면 앞서 말한 사항들은 더욱 극대화된다.

다행히 <노회찬 6411>은 노회찬 의원이 추구한 정치처럼 쉽고 간결했으며 종종 웃겼다. 127분의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 진보 정치 역사에 큰 역할을 한 노회찬 의원의 정치 역사를 들여다보는 건, 한국 진보 정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 길고 거대한 흐름이 영화의 형식으로 그려지니 역동적이고 드라마틱 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그의 사이다 발언도 영화의 재미를 더했다. 현시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통쾌함을 준다. 한 인간의(특히나 우리 사회 큰 발자취를 남긴) 방대한 삶을 정리한다는 게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건데, 그 작업을 잘 해낸 다큐멘터리다.

대중 정치인 노회찬
 
 영화 <노회찬 6411> 스틸 이미지
ⓒ 시네마6411
 
촌철살인의 정치인. 그가 남긴 재치 있는 비유들을 다시 보며, 그만큼 그가 대중과 닿고 싶은 정치인이었구나, 대중의 언어로 말하며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길 바라는 정치인이었구나, 대중의 이해를 우선으로 두는 정치인이었구나 생각했다.

얼마 전 인터뷰를 진행했던 청년활동가의 말이 떠올랐다.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과 대중의 언어가 굉장히 다르다고. 그런데 그 다른 언어를 정치하는 이들이 대중에게 잘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 중간다리를 잘 놓으면 대중도 정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알아듣고 그에 맞는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을 텐데,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며 언어의 차이가 정치를 어렵게 느끼게끔 하는 요인인 것 같다 말했다.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분명 정치는 우리들의 이야기인데, 우리 일상에 중요한 이야기들일 텐데 왜 이리 나와 멀게 느껴질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언어의 문제, 더 정확히는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더 소통하길 바라는 쪽에서 노력하게 되지 않던가. 정치를 더 잘 알고 싶다면, 정책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 정치의 언어를 공부할 테다. 대중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면, 소통하길 원한다면 대중에게 가닿을 수 있는 방법을 공부할 테다. 한쪽이 대중이 노력해야 하는 영역이고, 한쪽이 정치인이 노력해야 하는 영역이라면, 지금은 정치와 정책을 알기 위한 노력이 대중의 노력에만 치우쳐 있다. 균형이 맞지 않는다. 노회찬 의원은 후자였다. 대중과 소통하길 바랐고 대중에게 정치가, 정책이 잘 전달되길 바라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소통을 위해 선택한 비유와 유머는 쉬우면서 고급이었다. 적절하고 위트 있었다. 얼마 전부터 부쩍 '저걸 유머라고 하나?' 싶은 말을 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보인다. 그들이 비유나 유머의 교과서로 노회찬 의원의 영상을 보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말하는 능력 자체만 두고 말이다. 앞서 말했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의 문제는 정치인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중요한 영역이다.

노회찬 의원이 끊임없이 대중에게 가닿기 위해 노력한 이유는 그게 정치인의 도리인 것도 맞지만 대중 정치, 대중의 힘에 의지해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속 노회찬 의원의 모습과 인터뷰어들의 말에서 공통적으로, 한결같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세력과 계파가 아닌 대중의 힘을 믿었다. 자연스레 그가 노력해야 할 대상은 대중이 됐다. 그게 곧 노회찬 의원의 정치적 힘과 자산이 되는 것이므로.
 영화 <노회찬 6411> 스틸 이미지
ⓒ 시네마6411
이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치와는 다르다. 자신이 대변해야 할 이들이 누구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치인의 정치다. 그렇기에 오히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갔고, 잘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싸움들에 함께 했다. '말만 하는' 정치가 아닌 현장으로 가는 정치를 했다. 우리 사회 '투명 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했고, 그들이 볼 수 있는 정치를, 자신 또한 그들에게 보일 수 있는 정치를 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회찬 의원의 정치 신념은 유명한 그의 연설 "6411 버스를 아십니까"에 가득 담겨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들은 아홉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분들이 유시민을 모르고, 심상정을 모르고, 노회찬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실상 그동안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투명 정당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정치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지만 이분들이 필요로 할 때, 이분들이 손에 닿는 거리에 우리는 없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보이지 않는 정당, 투명 정당, 그것이 이제까지 대한민국 진보 정당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분들이 냄새 맡을 수 있고, 손에 잡을 수 있는 곳으로, 이 당을 여러분과 함께 가져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준비되었습니까?" - 2012년 진보정의당 당 대표 수락연설 중에서.

영화 속 인터뷰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이상적인 이념을 쫓기 보단 그날 그날의 현안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지금 시대정신에 맞는 의제를 무엇으로 둘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강조하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꿈꾸는 이상적 이념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중이 피부로 와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사람들이 하루하루 겪는 일들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는 일. 내가 이 일을 인지하고 있다고,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해결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러니 우리에게 힘(표)를 달라'라는 말의 설득력을 높이는 일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 그의 마지막 마음을 존중한다
 
 영화 <노회찬 6411> 스틸 이미지
ⓒ 시네마6411
 
영화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노회찬 의원의 마지막 선택과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의혹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 인터뷰이는 이렇게 말했다. '겉과 속의 불일치가 없는 사람, 마지막에 있었던 일이 그의 유일한 불일치였고. 그 불일치를 목숨으로 바꿨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노회찬 의원의 잘못은 충분히 해명하고 이해를 구할 수 있는 정도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몇몇 전문가들이 그의 해명에 정당성을 더해줄 수도 있었을 거다. 실제로 노회찬 의원 사후에 현행 정치자금법에 문제가 많다고, 개정이 필요하다는 말들이 있었으니까.

진보계열의 사람들에게 유독 도덕적 잣대가 높기도 하다. 옳은 말, 바른 말, 불편한 말 하는 이들이 도덕적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다. 본인이 말하는 대로만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만 바른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사회에 성찰과 발전이 있을까. 물론 본인이 한 말과 전면으로 반대되는 행위에 대해선 비난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그 잣대가 너무 높고 가혹하다.

정치인에게 혹은 공인에게 아무런 흠이 없길 기대할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그 가치와 닮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가를 기준으로 실망이든 기대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바를 완벽하게 지키며 사는 건 어렵지만, 그 말과 닮기 위해 노력하는 삶은 가능하다. 이 또한 충분히 위대한 삶 아닌가.

그러나 그런 걸 다 떠나서, 노회찬 의원은 자신의 불일치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 잘못의 크기를 떠나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더 이상 본인의 말이 대중에게 와닿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그 두려움이 크지 않았을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진보정치의 발전과 대중화를 위해 보냈고, 대중과의 연결을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했던 정치인이었으므로.

확실한 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부끄러운 정치인들 속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 정치인은 대중과 연결되길 끊임없이 바랐고, 새벽 4시의 6411번 버스 안 '투명인간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없다는 게 유권자로서 아쉽고 개인적으로 슬프다. 동시에 그의 마지막 마음을 존중한다. 2019년 4월 4일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의 앵커 브리핑으로 글을 마무리 한다.

"그의 놀라운 죽음 직후에 제가 알고 있던 노회찬이란 사람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를 한동안 고심했고, 그 답을 희미하게 찾아내 가다가 결국은 또 다른 세파에 떠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있던 차에 논란이 된 그 발언은 나왔습니다.

거리낌 없이 던져놓은 그 말은 파문에 파문을 낳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에 그 덕분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노회찬에 대한 규정, 혹은 재인식을 생각해냈던 것입니다. 즉, 노회찬은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 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 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 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오늘의 앵커 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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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벼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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