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현장실습생 고 홍정운군에게

여성국 2021. 10. 2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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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 탐사팀 기자

한강에 정박한 요트들을 본 적 있습니다. 화려한 요트의 가격과 그 주인이 궁금했을 뿐 운행·유지에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할 거란 생각은 못 했어요. 전남 여수의 홍정운군 사망 소식을 접하고 새삼 떠올랐습니다.

특성화고 3학년, 실습 10일차인 지난 6일. 승선 보조·고객 응대 일을 해온 당신은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떼란 지시를 받았죠. 잠수 자격증은 없었는데도요. 친구들은 당신이 깊은 물을 무서워했다고 전합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공포를 갖고 있죠. 저는 높은 곳을, 누군가는 폐쇄된 곳을 두려워합니다. 떠밀려 들어간 당신은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주검이 됐습니다.

어른들은 조사를 시작합니다. 노동부는 업체가 잠수 자격이 없는 당신에게 작업을 지시했고, 안전설비 점검·안전조치를 안했다는 법 위반 사항을 확인했습니다. 실은 제겐 정운군 같은 친구가 없습니다. 중학교 동창 일부가 실업계고에 갔지만 친한 친구 다수는 서울 소재 대학을 나와 공공기관·대기업 등에서 일합니다. 주변 선배들, 지나온 경찰·법조 출입처 취재원 자녀 중에서도 특성화고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간 잘 알지 못하는 현장실습생의 고충과 노동 조건은 책이나 기사로 접하고 넘겨온 것 같습니다.

지난 19일 전남 여수시의 한 요트 정박장 인근에서 홍정운군을 추모하는 모습. [연합뉴스]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판단하는 이들의 주변 삶은 비슷하거나 더 심할 것 같습니다. 이념을 떠나 특목고 자녀는 있지만 특성화고 자녀는 없을 테니까요. 현장실습생·비정규직의 죽음이 반복되는 건 이들이 주변에 없는 완벽한 타인이어서 그런 걸까요. 언론은 지금 여기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를 알려야 합니다. 어쩌면 저도 거악과 권력자에만 관심을 갖고, 아니면 서울 소재 대학·대기업 등 커뮤니티 글에 이입해 MZ세대 얘기를 푼답시고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에 무심했던 건 아닌지 반성합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산재 사망자는 1만1166명,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건 5114건. 벌금형(3176), 집행유예(728)가 대부분이고 29건만 금고 이상 실형을 선고받았답니다. 처벌 강화 보다 예방이 더 중요하다지만, 이 숫자를 보면 수년간 어떤 예방 노력을 한 건지 의문이 듭니다. 사고 벌금이 안전 비용보다 저렴하니 예방 노력을 외면한 건 아닐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프리모 레비는 “한번 일어났던 일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정운군의 죽음을 기록해 기억하고자 편지를 씁니다. “신문 기사는 역사에 기록을 남기는 일”이라 배웠으니까요. 기억은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죠. 그저 비극이라 여기는 대신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자문하겠습니다. 정운군과 이름 없는 이들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그곳에선 원치 않는 공포를 겪지 않길, 안온하고 행복하길 빕니다.

여성국 탐사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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