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폭격을 받고 있다"..6·25 때 알린 전보 찾았다
"지난 9월 15일 오전 11시경 울릉도 통조림공장소속선 광영호를 탄 해녀 14명 외 선원 등 합 23명이 출어 중에 있든 바 틀림없이 미군 비행기라고 추측되는 비행기 1대가 날아나 서독도 주변을 선회하면서 4개의 폭탄을 던졌다 한다…지난 17일 부산을 출발한 울릉도 독도학술조사단 일행도 행동을 제지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으로 울릉도 도민과 독도 조사단 일행은 폭격사건의 진상조사를 정부 당국과 군 당국에 의뢰하는 한편 앞으로 이와 같은 경고 없는 폭격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히 요망하고 있다."
1952년 9월 21일 조선·동아·경향 등 일간지를 장식했던 기사의 일부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독도에서 미군으로 추정되는 공군기가 폭격 훈련을 실시하면서 어민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식을 외부에 알린 것은 홍종인(1903~1998) 당시 조선일보 주필. 해방 이후 한국산악회를 이끌면서 독도 탐사를 주도했던 그는 유엔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공군기에 의해 독도 인근이 폭격장으로 이용되는 것을 목격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가 이 때 한국군 측에 긴급으로 보낸 전문 원본이 확인됐다. 이훈석 우리문화가꾸기회 대표는 최근 고서점 등을 통해 입수한 당시 문서를 24일 공개했다.
"해군참모총장 귀하, 한국산악회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은 18일 아침에 울릉도에 도착하여 19일에는 독도로 출발해 일부 대원은 21일 독도에 체류케 하고, 조사작업을 개시할 작정이었는데, 이곳에 와서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9월 15일 오전 11시경에도 유엔군 항공기로 인정되는 비행기 한 대가 독도에 대하여 사전 경고 없이 포탄을 던져서 출어 중의 어민 일행 23명이 황급히 퇴피했다는 것이다."(한국산악회)
홍 주필은 그해 9월 19일부터 2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이런 내용의 전문을 보냈으며, 군에서도 이를 인지해 미군과 유엔군 측에 정식으로 문의하기도 했다.
"귀전R6g호 양지함. 공군총참모장을 통하여 미제 5공군에게 문의중에 있으니 21일까지 그 지점에서 대기함이 가하다고 사료됨"(해군)
그러나 한국산악회의 독도 탐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9월 22일 해군 측에 보낸 전문의 내용은 이렇다.
"22일 드디어 독도행을 결행했던 본 조사단은 오전 11시경 독도까지 약 2km 접근하였었으나 두 시간 이상 계속되는 폭격 연습으로 상륙지 못하고 부득이 일단 울릉도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음. 이날 날씨는 극히 청명하여 비행기의 폭격광경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약 1000m의 고도에서 독도를 향해 연속 폭격하면서 점차로 고도를 높이 하여 나중에는 3000m 이상의 고도에서 폭격했는데, 우리는 더욱 위험을 느끼고 12시 40분 귀항하였는데, 비행기는 계속 폭격하다가 울릉도로 최종의 2대가 자취를 감추었음."
그러면서 "다음의 통신을 공보처장에게 가급 속히 전달해주심을 앙청한다"며 어민들의 피해와 독도 일대 보호의 필요성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리 정부로서는 지난한 환경과 싸우면서 절해고도를 지키고 있는 이곳 국민의 생업상 중요 근거지인 독도의 출어 안전을 사실로써 보장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국가로서는 어디까지나 우리 영토상의 우리 국민의 평화로운 생업상 활동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무리 절해의 무인고도라고 하지만 하등의 연락도 양해도 없이 무경고로 남의 국토와 국민 위에 폭탄을 던지는 경솔한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가 누구이건 주권 국가의 최소한 존엄으로써 적절 신속한 대책이 당연히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미군과 유엔군 측의 정식 답변은 확인되지 않았다. 홍 주필 등 한국산악회 일행은 1952~1953년 2년에 걸쳐 독도 탐사를 추진했고, 1954년에 성공했다.
이훈석 대표는 "6·25 전쟁이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독도를 우리 영토라고 인식하고 탐사대를 파견했고, 또 폭격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기 이를 막으려 한 탐사대의 헌신도 평가해야 한다"며 "독도의 날(10월 25일)을 맞아 홍종인 당시 주필과 한국산악회의 활약이 묻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자료를 공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홍종인 주필은 앞서 1948년에도 미군의 폭격으로 독도에서 어민이 희생된 것에 대해 강도높게 비판하는 글을 써 조선일보에 싣기도 했다. 이는 정치사회 문제로 크게 비화됐다.
6·25 전쟁 이후 홍 주필은 언론자유를 쟁취하는 활동에 헌신했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1959년에는 취재의 자유 보장 등을 내무장관에 요구하는 언론 자유 쟁취 활동을 벌인 공로로 필리핀 막사이사이 신문상 후보로 추천됐고, 1974년에는 박정희 정부의 압력을 받은 기업들이 정부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에 광고 계약을 무더기로 해약하자 세 차례에 걸쳐 개인 명의로 5단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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