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와중에도 수학여행이 계속돼야 할 이유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드디어 학교의 교문이 열렸다. 지금껏 새벽녘 부식을 실은 차량과 재학생, 교사를 제외하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는 그 어떤 사람도 교문을 넘지 못했다. 오죽하면 졸업장도 교문에서 드라이브스루 방식으로 나눠줬겠는가. 교문은 철통같은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이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듯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지난 2년간 그 모든 교외 활동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됐다. 소풍도, 수학여행도, 심지어 봉사활동까지도 사실상 금지됐다. 이유는 달라도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수학여행을 가게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고1 교실은 흥분의 도가니였다. 수학여행은커녕 하루짜리 소풍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터다. 지난 9월 체육대회도 밀집과 밀접을 최소화하기 위해 학년별로 오전과 오후로 나눠서 진행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말이 체육대회지, 체육 수업을 두세 시간 이어붙인 것에 불과했다. 종목별 예선과 본선을 학급 대항전으로 치르자니 경기 시간은 10여 분이 고작이었다. 아이들은 땀이 날 만하니까 경기가 끝나버렸다면서 입맛만 다셨다. 안 하느니만 못한 체육대회라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
공문을 통해 교육청의 '승낙'이 떨어지자 학교에선 번갯불에 콩 볶듯 수학여행 계획이 수립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년 교육과정에 수학여행 등 교외 단체활동을 반영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나 코로나로 닫혔던 교문이 열린다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설레했다.
▲ 변산 재백이고개 넘는 길. 발 아래 풍광에 감동하며 아이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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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을 떠나기로 한 건, 학교가 '위드 코로나'를 준비해야 한다는 첫 번째 신호였다. 자칫 그로 인해 집단 감염이 발생할 경우, 학교 안팎으로 파장이 만만치 않을 건 명약관화다. 수학여행의 취지나 교육적 효과보다 코로나로부터의 안전을 우선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예년 같으면 아이들에게 주제와 장소를 정하도록 하고 사전 학습과 일정 공유, 자료 준비까지 맡겼을 테지만, 올해는 그럴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매일 학년 담임교사들은 모여 계획을 논의했고 역할을 나눴다. 안전생활부 교사들과 학생회 아이들도 기꺼이 손을 보탰다.
대개 고등학교의 수학여행 일정은 3박 4일이지만,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이틀로 줄였다. 애초 기대조차 없었던 아이들은 그마저 감지덕지했다. 아이들은 숙소에서 친구들과의 '베개 싸움'이 수학여행의 '꽃'이라며 아쉬워했지만, 방역지침을 고려해 숙박도 하지 않기로 했다.
말하자면, 이틀간 소풍을 두 번 다녀오는 식이다. 오고 가는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을 테지만, 그 역시 수학여행의 일부이니 버스 안에서의 프로그램을 학급별로 알차게 준비하도록 했다. 아이들은 답답한 교실을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더는 바랄 게 없다는 눈치였다.
그렇듯 급조된 수학여행 주제가 '산과 바다'였다. 지난 2년 동안 학교와 집만 오가며 꼼짝없이 갇혀 지냈으니, 청명한 가을날 푸른 산과 바다를 종일 마음껏 만끽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첫날은 전북 부안군의 변산으로, 이튿날은 전남 여수시의 만성리 해안으로 최종 결정됐다.
변산은 그다지 가파르지도 않고 멀지도 않아 산행에 서툰 아이들에게도 제격이라 여겼다. 여수는 즐길 거리와 공부할 거리가 한 곳에 있어 맞춤한 곳이라 판단했다. 폐선된 옛 전라선 철길을 이용한 레일바이크를 체험한 후 인근의 여순 사건 유적지를 탐방할 계획이었다.
주제와 장소가 정해졌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9개 학급이 동시에 움직이는 건 방역지침에 위반될 소지가 있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넌다는 심정으로 밀집을 최소화하기 위해 서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계획을 세분화했다. 우선 학급 단위로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4개와 5개 학급으로 학년을 나눈 뒤, 이틀간 변산과 여수를 교차로 다녀오도록 했다. 변산의 경우, 채석강 코스를 삽입해 시간 차이를 두었고, 산행의 방향에 따라 다시 둘로 쪼갰다. 여수도 부러 제트보트 체험을 끼워 넣어 학급 간에 서로 겹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했다.
감탄
"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요."
아이들과 나란히 걸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감탄사다. 땀 흘리며 레일바이크의 페달을 밟을 때도, 숨넘어갈 듯 헉헉대며 변산을 오를 때도 아이들은 연신 신나 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셔터를 눌렀고, 비릿한 바다 내음에도 마구 심호흡을 해댔다.
마냥 즐거워서일까. 아이들은 지나가는 낯선 산행객에게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오히려 인사를 받은 산행객이 놀라 쭈뼛거릴 정도였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의 한 직원은 몇몇 산행객이 사무실에 찾아와 "저렇게 인사성 밝은 아이들은 처음 봤다"며 추켜세우더라고 전했다.
이번 여행은 교사로서 교실에선 깨닫지 못했던 아이들의 착한 심성을 본 계기기도 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에 산행 도중 친구 한 명이 뒤처져 간격이 벌어지자 그를 돕겠다며 왔던 길을 되돌아간 아이들이 있었다. 힘들어하는 친구의 손과 발이 돼주는 모습이 뭉클했다.
산행 도중엔 벗어도 좋다고 했건만, 몇몇 아이들은 별로 힘들지 않다며 한사코 마스크를 그대로 쓴 채 험한 산길을 걸었다. 풍광 좋은 고갯마루에 올라 단체 사진을 찍을 때조차 마스크를 벗지 않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들의 땀에 전 마스크를 보노라니 대견하기보다 미안했다.
내년에도 소풍과 수학여행을 갈 수 있으려면 조금 힘들고 번거로워도 참아야 한다고 말하는 듬직한 아이도 있었다. 여기서 단 한 명이라도 감염자가 나온다면 다시 교문이 닫히게 된다며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과의 반나절 산행길은 더없이 훌륭한 학교였다.
▲ 여순 사건 위령비 앞에서. 아이들은 진상규명에 끝까지 관심을 가지겠다는 다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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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만끽하러 간 하루짜리 여수 여행도 성공적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여순 사건 73주년 기념식이 치러진 며칠 뒤였다. 찾아간 유적지마다 추모 현수막이 펄럭였고 헌화한 꽃다발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딴청 피우는 아이 하나 없이 모두가 숙연한 얼굴로 희생자를 기렸다.
레일바이크 철길 바로 옆의 '형제묘'에는 전남과 제주의 두 교육감이 다녀간 흔적이 있었다. '형제묘'는 여순 사건 당시 종산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학살된 125구의 시신이 불태워져 매장된 곳이다. 두 교육감이 함께 이곳에 와 헌화한 이유를 묻는 눈 밝은 아이도 있었다.
알다시피, 4.3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미군정과 이승만의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무력으로 맞선 게 여순 사건이다. 제주 4.3이 아니었다면 여순 사건은 애초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지금 전남과 제주의 교육청에서는 두 사건을 주제로 한 학생 교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마침 지난주 수업 시간에 제주 4.3과 여순 사건에 대해 배웠던 터라 아이들은 자문자답하듯 의미를 짚어 냈다. 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에 그 오랜 세월이 걸렸는지도 너끈히 추론해냈다. 나아가 광주의 5.18까지 연계시키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여행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더니, 2년 만에 교문을 박차고 나온 이번 수학여행을 두고 하는 말 같다. 그저 콧바람이나 쐬도록 할 요량이었는데, 별 기대 없이 찾아간 산과 바다가 아이들을 한 뼘 더 성장시키는 배움터가 돼줬다. 코로나 와중에도 수학여행이 계속돼야 할 이유다.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평소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내듯, 교사로서 수학여행과 같은 교외 단체활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잊고 살아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개인적으로는 지난 이틀간의 수학여행이 지금까지 숱하게 경험한 나흘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표정을 보며 나도 덩달아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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