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위에 세워진 자본주의, 밀려난 사람들의 풍경화
[김상목 기자]
▲ 영화 <사상> 포스터 이미지 |
ⓒ 시네마달 |
박배일이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있다. 2011년 <잔인한 계절>로 서울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 부문 우수상, <나비와 바다>로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부문 최고상인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면서 다큐멘터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박 감독은 이후 현재까지 자신에게 인장처럼 새겨진 '밀양' 연작에 돌입한다. 2014년과 2015년 연달아 선보인 <밀양전>과 <밀양 아리랑>은 서울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 우수상(<밀양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서울환경영화제 한국환경영화 대상(<밀양 아리랑>)을 수상하고 독립 다큐멘터리로선 쉽지 않았던 극장 개봉에 이른다.
2016년에는 <깨어난 침묵>으로 부산평화영화제 관객상과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한국구애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감독은 2017년, 송전탑 설치 갈등을 다뤘던 밀양에 이어 성주 소성리의 사드 배치 문제를 담은 <소성리>를 선보였다. 두 번째 부산국제영화제 비프메세나상을 비롯,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 서울환경영화제 한국경쟁 우수상, 부산평화영화제 꿈꾸는 평화상 등을 수상하며 '박배일'이라는 이름은 이제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다큐멘터리 분야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었음을 (감독 본인 빼고) 모두가 인정하게 된 상황이다.
감독은 꾸준히 '노동'과 '환경(생태)',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담는 작업을 지난 10년간 수행해 왔다.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잔인한 계절>은 부산의 환경미화 노동자들의 일상을, <깨어난 침묵>은 지역 막걸리 양조회사 '생탁' 노동자들의 투쟁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첫 번째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한 <나비와 바다>는 장애인 커플의 결혼 과정에서 겪는 난관을, <라스트 신>은 감독 또한 즐겨 출입하던 지역 독립예술영화 극장의 마지막 시간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감독의 이름을 아는 이들이 가장 먼저 떠올릴 법한 <밀양전>과 <밀양 아리랑> <소성리>는 각각 밀양과 성주 소성리에서 '원활한 전력 수급'과 '한미군사동맹 유지'라는 명분 아래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과 그에 짓밟히면서도 저항을 거듭하는 농촌 공동체의 삶을 담아낸다.
'독립영화'에서 이제는 점점 지분이 축소되고 있는 '액티비즘' 경향을 2010년대 이후 견결히 놓지 않는 이런 감독의 성향과, 그가 영화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괴리가 크다.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탄탄한 선배층이나 학문적 계승을 통해 성향을 물려받은 게 아니라 작업을 하면서 쌓아간 실증적 경험치가 감독의 작품 경향을 이끌었고, 그가 동료들과 함께 10년간 유지해온 다큐멘터리 공동체 '오지필름'이 기반이 되어 궤도의 일탈을 방지해왔다.
단지 영화 제작을 넘어 상영활동이나 지역 연대에 이르기까지 오지필름이란 집단 또한 참 많은 일을 해 왔다. 그런 10주년이 되는 2021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소박한 기념으로 영화제 기간 기획전이 있었고, 기념작으로 박배일 감독이 9년 걸린 새 영화 <사상>을 개봉하는데 이른다. 과연 <사상>은 어떤 내용과 주제의식을 담고 있을까? 감독과 오지필름을 아는 이들이라면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한 대목이다.
▲ 영화 <사상> 스틸 이미지 |
ⓒ 시네마달 |
박배일 감독의 신작 <사상>은 감독이 장편 데뷔작을 선보인 이후 9년간 늘 차기 프로젝트로 언급되어온 작업이다. 과연 이 프로젝트가 정말 완성될 것인지 의심을 품은 적도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과거 독립영화들의 주된 특징이던, 현재도 상징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는 방향성인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를 21세기에 특별한 연속성 없이 착목해왔던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사적 소재가 두드러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감독의 작업을 '공익적 관점'에서 주시해온 이들에게는 기대와 불안이 공존해왔을 법한 이야기다.
제목인 "사상"은 감독이 태어나고 자란 부산 사상구의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유역으로 경상남도 동래군에 속하던 부산의 서쪽 변경이 도시로 편입되면서 이 모래톱 일대 농어촌 지역은 사상공단을 중심으로 부산 최대 공업지대로 변신한다. 하지만 울산이나 마산창원 같은 대규모 공업단지는 아니었다. 중소규모 주물공장 위주의 사상공단은 주거지역과 공장지역이 뒤섞여 서울로 치면 문래나 가리봉 같은 풍경이 되었고, 일자리를 찾거나 부산 중심부에서 밀려난 이들이 여기로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감독 자신이 그 변천사를 직접 삶으로 체험해온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본 작품은 해당 지역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포괄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감독이 시도하고 연구해온 다양한 촬영과 편집 기법을 작심하고 투입한 실험적 연출도 종종 접할 수 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늘 주역이 되었던, 기구한 사연을 잔뜩 품은 할 말 많은 주인공 캐릭터들이 <사상>에서도 중심축으로 등장한다. '박성희'와 '최수영', (감독의 작품세계를 상징해온 '할매'들이 아닌) 노년기에 접어든 두 남성들은 각각 사상이라는 공간에서 '노동'과 '공동체'라는 주제의 구심으로 작품 속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박성희는 감독의 부친이다. 하지만 감독이 그동안 자신의 동년배나 후속세대가 주로 천착해온 '사적 경향'을 본인 작품에 도입하고자 끌어들인 캐릭터는 아니다. 사상이라는 공간에 깃든 노동의 기운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존재로서 (다소 쉽게 촬영 가능하다는 감독 본인의 계산여부와는 별개로) 30년간 금속주물공장을 전전하다 일용직 건설노동자로 삶을 이어가게 된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러다가 산재사고로 병원신세를 진 부친의 지나온 삶과 현재의 모습은 쇠락한 노동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효과적으로 배치된다.
최수영은 감독과 오지필름의 동료들이 오랜 기간 연대했던 '현장', 부산의 근래 가장 대표적 재개발 투쟁으로 알려진 만덕5지구 대책위원회 대표였다. 그는 정당한 보상과 이전대책을 요구하며 시위와 농성에서 중심으로 활약했고, 마지막 시도로 고공농성까지 단행했다가 장애를 입었다. 부산의 '용산'이라 불릴 만큼 장기간 끈질기게 이어진 싸움이었지만 외형적 결과만 놓고 보면 승리했다고 보긴 어려운 상황. 함께 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최수영은 앞장서 고생했음에도 성과가 대체 뭐냐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감독은 투쟁 시기와 종료 이후의 그를 (장기간 지연된 작업의 예상 못한 효과이기도 하다!) 아주 오랫동안 기록하며 그의 변천사를 세월의 흐름이 드러나게 선보인다.
▲ 영화 <사상> 스틸 이미지 |
ⓒ 시네마달 |
감독은 노년기에 접어든 두 남자의 상처입고 쇠잔해진 육체와 회한 섞인 표정을 참 집요하게 클로즈업한다. 또한 그들이 살던 초라하고 남루한, 하지만 세월의 흔적과 함께 추억이 깃들었던 동네가 해체되는 풍경이 다른 축으로 교차하며 등장한다. 이 (사람의) 육체와 (도시-공간의) 육체 이미지는 서로 혼합되며 점점 사상과 그곳에 살아가는 주민들로 일체화되어간다. 이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욕망이 할퀴고 짓밟은 흔적과 함께, 아무리 힘써 대적해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지전능한 공포의 권위로 '자본주의 도시'의 폭력성이 무겁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부분은 감독이 무대를 밀양과 소성리의 산골마을에서 부산 한복판으로 옮겨왔을 뿐 여전히 놓지 않고 조명하는 주제의식, '국가폭력'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파괴적 효과로 공통점을 가진다. 그 국가폭력은 결국 우리가 막연히 동의하지만 정작 자기 일이 되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여러 가지 상황들, 그런데 찬찬히 따져보면 도무지 왜 강행하는지 납득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를 위해 야만적으로 휘둘러진다.
감독은 그 국가-자본의 권력을 "가부장제"로 명명하지만 <사상>에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대신, 생물학적으론 남성이지만 VS 권력관계에선 사회적으로 여성 젠더가 처하는 현실 관계에 흡사한 두 출연자를 내세우는 독자적 면모를 선보인다.
'경지'에 다다른 감독의 표현주의 실험
초반부터 감독은 두 주역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와 함께 이미지와 사운드로 전달되는 시적인 느낌의 단상들을 행간 곳곳에 꽉꽉 채워 넣는다. 초현실주의 풍경화를 보듯 폐건물과 재개발 현장 곳곳을 광각과 클로즈업, 부감 등으로 뽑아낸 컷들이 수시로 출몰한다. 되감기와 타임-랩스 기법으로 관객의 상상을 자극하는 생물과 무생물의 움직임과 덩어리 형상들. 특별한 설명 없이 비주얼로 전달하는 사상이란 공간의 키워드들이 그득하게 채워진다.
감독은 내레이션을 직접 수행하지만 2시간 좀 넘는 짧지 않은 호흡의 영화에서 내레이션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건 1시간이 경과해서부터다. 관객이 길잡이를 찾지 못한 가운데 어느 정도 방치되면서 필사적으로 자신이 처한 관람환경을 돌파하고자 오감을 집중하길 고의적으로 꾀한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집중해 온 관객에게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펼치면 쏙쏙 들어오기 마련이다.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기교는 이제 중견 대접 받아 마땅한 감독의 경험치가 반영된 것일 테다.
그럼에도 여전히 파편적으로 인식될 법한 장면들도 적지 않다. 작품 전체로 보자면 콜라주의 조각 모음ㅇ같은 지점들이다. 영화의 2/3가 지났을 쯤, 별안간 등장하는 무슬림 이주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노동과 일상, 예배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얼핏 보면 말 그대로 뜬금 없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이유가 명확히 존재한다. 감독의 부친처럼 이제 늙고 병들어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의 자리를 누가 대신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사상공단에서, 마석공단에서, 동대문 봉제공장에서 '누가 한국인 노동자들의 자리를 물려받았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자, 현재의 노동 문제를 조명하는 '신'에 해당한다. 사상이라는 공간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는 다소 진입 턱에 속하는 부분인 셈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인상적인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이주노동자 풍경이 전체 전개와 낯설어 보이지만 작품의 밸런스에선 의미가 명백한 것과 반대로 활용되는 장면이다. 사상공단과 함께 지역의 양대 수입원인 관광 관련 축제 현장 영상이 해당 지역의 유력 정치인들과 함께 펼쳐진다. 지역구에서 대를 잇는 유력 가문의 입지를 아는 이들이라면, '사상'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에 또 하나의 레이어를 덧붙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체 흐름과 다소 유리되지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역할을 담당하며 도시공간의 정체성에 한 단면을 추가한다.
기괴한 이미지 덩어리들도 출몰하곤 한다. 박수영의 집 축축한 욕실과 외벽에는 인간 외에 다른 존재들이 즐비하다. 그 기어 다니는 다리 많은 벌레들과 (반대로 다리가 없는) 민달팽이는 어느 순간부터 철거된 건물에서 나온 철골 덩어리와 겹쳐져 보이기 시작한다. 유기체와 무기체를 넘어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유사성의 발견. 길고양이가 등장할 때 독립예술영화 관객들은 대개 환성을 지르겠지만, 이 영화 <사상>에서는 등장해도 병들고 늙어 위태로운 모습일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다. 도시공간은 그동안 감독이 자주 다뤄온 농촌 공동체의 '향토적 기운'은 애초에 증발해버린 곳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주인공들로 돌아가 보자. 박성희와 최수영의 늙고 병든 육신은 서로 퍽 닮아있다. 박성희는 산재로 신체의 일부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린다. 최수영도 투쟁의 기억에 관해 혼란해하곤 한다. 패배의 기억은 두 사람을 끊임없이 움츠러들게 강요한다. 이웃이나 고향이란 개념이 소거된 도시공간에서 그들의 소외와 고독은 시골에서 마지막 무리를 모아 집단적으로 항거하는 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사상>은 철저히 '도시적 감성'과 '공간에 대한 분석'이 어우러진 작업이다.
박배일 감독과 오지필름의 다음 10년을 예고하는 작업
하지만 감독의 제작의도가 그렇게 이미 패배한 '생존자의 회고록'은 아닌 듯하다. 사상이라는 공간의 재개발 과정을 압축 요약해 시각적으로 전하는 무빙-이미지가 영화 내내 휙휙 돌아간다. 지역과 공간의 정체성이 급격히 변모하면서 어떻게 그곳에서 계속 존재했던 이들과 유리되어 가는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를 영화는 숨겨진 역사책처럼 기록하는 작업을 되풀이한다. 감독은 (자신이 결코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그 과정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써내려가는 힘든 숙제를 끙끙 앓아가며 해냈다.
영화의 결말은 대충 이렇다. 최수영이 재건축 후 새로 건설된 단지에 입주하면서 느끼는 회고와 성찰을 전달하는 것과 함께, 박성희가 끈질긴 재활 끝에 산재사고 후 4년 만에 다시 일용직이나마 노동을 재개하는 순간을 마무리로 선택한다. 지난한 패배의 연속 와중에도 감독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본인의 라이프 워크이자 지난 10년간의 영화인생에 분기점을 찍는다.
<사상>은 친절한 작품과는 거리가 멀다. 스트레이트하게 접근하는 선전홍보 목적의 노동/투쟁 다큐멘터리도, 자전적 경험을 풀어내는 사적 경향 에세이 영화와도 거리가 좀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사유와 현란한 테크닉으로 세공한 실험영화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감독이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견지해온, 노동과 연대에 천착하던 주제의식에 작가적 욕망이 발현된 다채롭고 정교한 시도가 이전 작업들에 비해 점점 더 짙은 색채로 다가온다. 감독의 지난 10년을 결산하는 결과물이자, 다음 10년을 어떻게 출발할지 추측하는 그릇으로서 <사상>은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대상으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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