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가 지킨 장판파..조조는 그곳에 없었다

입력 2021. 10. 23. 09: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임용한 박사의 '당신이 모르는 三國志'](31)
일러스트 : 정윤정
조조는 단숨에 형주를 석권했다.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것과 달리 조조는 형주를 온건하게 다스렸다. 항복해온 유종을 살해하지도 않았고, 괴월 같은 유표의 신하들도 잘 대해줬다. 옛 친구기도 한 채모는 말할 필요도 없다. 소설에서는 조조에게 의심을 받은 채모가 적벽대전 전에 사형당했다고 그려진다. 실제 역사는 다르다. 채모는 조조의 배려 속에 행복한 여생을 살았다.

그러나 조조에게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배신자’ 유비다. 조조는 5000명의 정예 기병을 뽑아 특별 추격대를 편성했다. 무장을 가볍게 한 경기병으로 꾸려진 조조의 추격대는 빠른 속도로 유비를 추적했다.

당시 유비는 형주 서쪽으로 도주하고 있었다. 조조가 아직 점령하지 못한 강릉·무릉 지역으로 피신하고자 했다. 조조를 피해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속도였다. 유비를 따르는 피난민으로 인해 행군 속도가 매우 느렸다. 측근들이 피난민을 버리고 도주해야 한다고 권했으나 유비는 거절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유비는 “백성이 없으면 나도 없다”고 선언했다. 이 말은 ‘나는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주군이다’라는 과시형 멘트가 아니라 순수한 진실이었다. 영토도 권력도 없는 유비에게 있는 유일한 자산은 백성의 신망이었다. 이들을 버리고 떠난다면 유비는 빈털터리가 되고 재기 불능이 된다. 조조의 추격대가 목숨을 위협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자산인 피난민을 끝까지 챙기는 길을 택했다. 유비로서는 목숨과 맞바꾼 도박에 뛰어든 셈이다.

순진한 백성이나 병사, 관료는 ‘백성을 걱정하는’ 지도자 유비에 열광했다. 하지만 제갈량 같은 고수의 생각은 달랐다. 제갈량은 ‘이 사람은 난세에 도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판단했다. 제갈량이 평생 유비를 따르기로 결정한 뒤에는 유비의 청순한 인격이 아니라 이처럼 ‘난세 영웅’으로서의 됨됨이를 본 영향이 컸다.

물론 유비의 결심은 야망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의미이지, 유비가 진짜 난민들과 함께 죽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헛되이 죽는다면 야망을 이룰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피난민들이 ‘백성을 버리고 나 혼자 도주할 수 없다’는 유비의 자세만 알면 충분했다. 결국 유비는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주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정도로 백성들과 함께 움직이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20여기의 기병만 거느리고 도주했다.

추격대가 너무 근접할 때까지 버틴 탓에 달아나기로 결심했을 때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 누군가가 조조군의 추격대를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 유비는 조운에게 처자식의 호위를 맡기고, 자신은 가족도 버린 채 장비와 함께 달아났다.

피난민과 병사들, 상당량의 군량과 장비가 조조군에게 노획됐다. 유비의 가족들도 뒤로 처졌다. 조운이 가족을 호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애를 썼지만, 유비의 딸들이 조조군 추격대에게 생포됐다. 조조가 핍박하거나 살해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의 그 후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

▶기지를 발휘해 장판파를 지킨 장비

도망친 유비 곁에 있는 장수는 장비뿐이었다. 장비는 겨우 20여기 기병만을 거느리고 목숨을 버릴 수도 있는 유비 호위 임무에 자원했다.

장비가 방어 지점으로 선택한 곳은 장판파라는 작은 개울이었다.

소설에서는 장비가 장판파의 작은 다리 앞에 홀로 서서 조조가 직접 인솔하고 온 수십만 대군과 맞선다. 조조는 관우가 했던 말, ‘장비는 전쟁터에서 적의 목 따기를 주머니 속에서 물건 꺼내듯이 한다’는 말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 자세히 보니 장비의 뒤에 있는 숲에서 먼지가 일고 있다. 이미 제갈량의 계략에 충분히 당해본 조조는 무슨 흉계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짐작한다. 조조가 머뭇거리자 하후걸이라는 장수가 장비에게 돌진하지만, 장비의 호통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 광경을 본 조조는 놀라 도주한다. 여기까지가 삼국지연의에서 그려내는 ‘장판파 전투’다.

실제 역사는 많이 다르다. 조조는 직접 장판파에 오지 않았다. 병력도 5000명의 추격대 중 일부였다. 숫자가 적은 소수의 분견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수 추격대라고 해도 수백 명은 족히 넘었다. 기병 20기로 막아낼 수 있는 수는 아니었다.

삼국지 정사에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장비는 다리를 끊고,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 잡으며 말했다.

“나는 장익덕이다.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겠는가?”

적 중 감히 가까이 가는 자가 없었다.

여기에 더해 두 가지 상황을 더 가정할 수 있다. 조조군은 급하게 추격해 왔으니 무장을 가볍게 했을 것이다. 반면 장비와 후위 기병들은 중갑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무장이 빈약한 경기병이 중갑 기병을 상대로 싸우기는 쉽지 않다.

또 하나는 오환족 기병의 존재다. 유비는 서주에서부터 원소가 지원해준 유목 민족인 오환족 기병을 데리고 왔다. 장비와 함께한 20기의 기병은 중원 기병보다 훨씬 강력한 ‘오환 기병’일 가능성이 크다.

이 두 가지 가정까지 더하면 조조군 기병이 감히 장비에게 도전하지 못한 이유를 좀 더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다. 장비 개인의 위세에 겁먹기보다는 여의치 않은 상황이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먼 거리를 이동해 지친 조조군 경기병에게 단단히 무장을 한 유목 기병은 부담스러운 상대였을 테다.

손권에게 달린 유비의 생명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기 직전, 손권은 강하를 지키는 유표의 부하 황조를 죽였다. 이 사건이 의도치 않게 유비에게 도움이 됐다. 황조가 죽자 유표는 황조를 대신해 유기를 강하로 파견했다. 유기가 계모 채 씨와 채모의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갈량에게 도움을 청하고, 제갈량의 충고로 강하로 갔다는 이야기는 소설 속 허구다. 유표는 텅텅 비어버린 강하 지역을 가만히 둘 수 없었기 때문에, 유기를 급하게 보냈을 뿐이다.

접경 지역인 강하로 간 유기는 1만명에 가까운 정예 부대를 거느릴 수 있었다.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한 덕분에 몸만 챙겨 도망쳐 온 유비에게 큰 도움이 됐다.

유비는 유표의 아들인 유기를 만나 아직 조조에게 점령되지 않은 형주 지역을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유비는 즉시 유기를 유표의 후계자로 추대했다. 유기는 형주의 잔존 세력을 결집하는 고마운 역할만 해주고 사망했다. 유비는 서주에 이어 형주에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권력과 군대를 얻었다. 이 험한 난세, 불의와 불충의 시대에 자신의 고운 명성을 보존하는 행운까지 얻었다. 그러나 유기의 병력과 일부 패잔병만으로 조조에게 대항하기란 여전히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더 위험한 일은 손권의 오나라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는 중국에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게 된다. 중원의 미래와 유비의 생명은 이제 손권의 손에 달렸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30호 (2021.10.20~2021.10.26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