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손님이 왕이면 나는 황제다
광고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광고주를 만날 일이 잦았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의뢰인이자, 우리의 아이디어를 사주는 고객님이자, 프로젝트의 방향을 좌지우지하는 결정권자였다. 철저한 갑이었다. 갑의 권위 앞에 을로서 고개를 조아린 에피소드는 천일야화급으로 쏟아낼 수 있지만 특히 생각나는 사건 몇 개가 있다.
어떤 클라이언트는 미팅에 종종 늦곤 했는데 우리는 늘 미소를 띠며 ‘아이고, 엄청 바쁘신가 봐요’라거나 ‘찾기 어려우셨죠?’라는 말과 함께 그를 맞이했다. 딱 한 번 우리가 늦은 적이 있는데 그가 농담인 양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좀 편하신가 봐요? 완전 빠졌네.” 빠졌다니! 위계가 확실한 조직에서 힐난의 의미로 쓰는 말의 대표 격이 아닌가. 빠졌다는 말에 얼이 빠진 우리는 쓰게 웃었다.
어느 겨울엔 이런 일이 있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준비한 광고 시안을 들고 가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자리였다. 팀장님이 열띤 목소리로 아이디어를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클라이언트 중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다. “어? 눈 온다!” 그 말과 함께 광고주 쪽 사람 몇몇이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창밖을 보았다. 빔 프로젝터의 창백한 불빛 앞에 멀뚱히 서 있던 팀장님은 “허허 첫눈이네요”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내가 극단적 사례만 소개해 그렇지 세상에는 매너가 훌륭한 광고주도 많다. 이런 클라이언트하고만 일한다면 회사 평생 다니겠다는, 성급한 다짐까지 튀어나오게 하는 좋은 ‘갑’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에 철저히 부합하는 태도를 취하곤 했다. 아니 왕을 넘어 신처럼 군림하곤 했다.
나는 종종 이런 의문을 품었다. 비용만 내면 누군가에게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일까? 금전이 엮이는 순간 갑을 관계, 사용자와 피사용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돈을 내며 맡기는 일은 스스로 너끈히 할 수 있는 일을 선심 쓰듯 맡기는 것이 아니다. 본인 시간이 부족하든, 전문성이 부족하든 타인의 능력이 필요해 의뢰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 일을 맡아준 타인에 대한 존중이 기본임에도 어떤 이들은 ‘내가 돈을 썼으니까 너는 내 하수인’ 모드를 발동시킨다. 나는 동료가 된다고 생각하고 일을 받았는데 갑자기 하인 취급이 시작된다.
돈자루를 쥔 이들의 서슬 퍼런 권위에 마음이 움츠러들 때마다 떠올리는 말이 있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지인이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손님이 왕이면 나는 황제다.” 나는 그 말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가 적당한 친절과 자존심을 바탕으로 업장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매우 살가웠지만 그 다정함은 부담스러운 적이 없었고 지나치게 굽신거리지도 않았다. 그를 보며 생각했다. 가게를 채운 사람들이 각자 자기 세계의 왕일 수 있지만 가게 주인 역시 그 영역의 황제로구나! 나의 영지, 나의 제국을 방문한 각국의 왕들을 존중하면서도 황제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광고회사를 그만뒀지만 프리랜서로서 여전히 누군가에게 일을 의뢰받으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제 ‘작가’로서 살아가야 할 내가, 고객 요구에 지나치게 나를 맞추고 낮추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어린 날부터 시작된 오랜 회사생활로 을로서의 자세가 체화된 탓이다. 여전히 의뢰인은 왕처럼 느껴지고 그의 요구는 왕명 같기만 하다. 덕분에 주관을 가지고 의견을 주장해야 할 때도 내 목소리는 작아지곤 한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마음이 쪼그라들 때면 주문처럼 읊조려본다. 손님이 왕이면 나는 황제다. 클라이언트는 나의 어떤 역량이 필요해 내 제국을 찾아온 타국의 왕이다. 나는 황제의 존엄을 가지고 그를 대해야 한다. 자존심을 가지고 일에 임해야 한다. 습관적으로 수그러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내 음성에 조금 더 권위를 실어.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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