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여덟 계단 게임의 암울한 미래

입력 2021. 10. 22. 00:38 수정 2021. 10. 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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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1, 2, 3, 4, 5, 6, 7, 8. 바로 옆으로 돌아서 다시 1, 2, 3, 4, 5, 6, 7, 8. ‘오징어 게임’ 다음 시리즈에 등장할 게임의 규칙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람 절반 정도는 이 게임에 참가할 수 있다. 조건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관문을 나서서 계단의 단수를 세보면 이런 숫자가 나올 것이다. 이 숫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좀 특이한 아파트라고 보면 된다.

한국의 아파트는 대통령선거의 향배까지 규정하는 사안이 되었다. 이 문제가 풀기 어려운 건 복잡한 변수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복잡한 물건에 붙은 계단의 단수는 막상 저리 일정하다. 그건 아파트의 층고가 다 같다는 이야기다. 2.8m 내외. 그 안에 들어있는 천장높이는 2.3m. 따라서 커튼, 붙박이장 주문할 때는 폭만 알려주면 된다.

「 50년간 지어온 벽식구조 아파트
경제적이지만 미래변화 적응 불가
새롭고 다양한 가족의 사회 요구
기둥식구조 아파트의 유인책 필요

아파트 층고 통일의 배경에는 건설시장의 원가계산이 깔려있다. 기둥이 하중을 받고 내부 공간의 구획벽은 하중을 받지 말게 하라는 것이 근대건축의 핵심강령이었다. 자유로운 평면구성의 성취라고 불렀다. 우리의 초기 아파트에서도 기둥이 하중을 받게 하는 실험이 있기는 했다. 그런데 이 방식은 바닥슬래브를 받치는 데 ‘보’라는 구조물을 추가로 요구한다. 한옥에서 대들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여기에는 그 보의 높이만큼 층고가 높아져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기둥 말고 건물 내부의 촘촘한 벽들이 하중을 받게 하면 보를 없앨 수 있다. 이걸 벽식구조, 혹은 내력벽구조라고 부른다.

층고를 30cm만 줄여서 10층을 쌓는다면 이미 한 층을 벌 수 있다. 기둥식 아파트를 짓는 건 아파트 건설업 게임에서 생존의지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우리의 근대 아파트는 전근대의 강령으로 돌아갔다. 지난 50년간 전국에 통일된 최저층고의 벽식구조 아파트가 세워졌다. 범국민적 여덟 계단 게임이 가능해졌다.

그 아파트 게임에 참여해 사는 이들은 일사불란한 ‘정상가족’이었다. 통일된 교복 입고 동일한 교과서로 공부한 사람들이 한 종류 대입시험을 치러 입학하고 졸업하고 취업했다. 나이 차면 결혼했고 아이 둘 낳아 살았다. ‘4인 정상가족’이 완성되었다. 이 정상가족의 기준표에 맞지 않게 산다치면 추석·설에 취조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취업은 되느냐, 연애는 하느냐, 결혼소식은 없느냐, 늦기 전에 아이는 낳느냐, 하나 더 낳아야 하는 게 아니냐.

정상가족이 사는 아파트를 국민주택이라고 불렀다. 그중 민간건설 국민주택은 심지어 면적 하한도 규정했었다. 전용면적 60㎡ 이상 85㎡ 이하. 거기 방이 딱 세 개 배치되었다. 그 방을 구획하는 벽들이 아파트를 받치는 구조체다. 그래서 전국의 아파트는 궤짝 같고 닭장 같아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 안에 4인 가족이 다 비슷하게 알콩달콩 살고 있으리라는 신기루 같은 전제가 있었다. 국민주택보다 면적 넓은 아파트라도 층고는 높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덧 ‘이상한 정상가족’이 점점 많아졌다. 아이 둘을 낳으라고 했는데 하나 낳는 것도 버거워했다. 가구수 기준으로 1인 가구는 40%를 넘었고 2인 가구 합치면 60%가 넘는다.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높은 국가들 사례로 비춰보면 이런 가구수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남녀가 혼인하여 가족을 이룬다고 해왔는데 그 남녀의 이분법 타당성도 질문해야 마땅한 시기가 도래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쓰던 가훈을 개화만사성(個和萬事成)으로 바꿔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내용이 바뀌면 그릇도 바뀌어야 한다.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은 방 세 개의 아파트가 아니라 좀더 다양한 주거양식이다. 그 다양성을 수용하는 합리적 방법은 아파트의 기존 뼈대를 놔두고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문제는 벽식구조 아파트가 이걸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 두 개를 터서 하나로 만들려면 벽을 없애야 하는데 그 벽은 하중을 받는 구조체다. 벽 하나만 헐어도 건물 전체가 붕괴한다. 그렇다면 전면 철거 후 재시공밖에 대안이 없다.

대안은 기둥식 구조의 아파트다. 법률은 이걸 촌스런 작명으로 장수명 아파트로 부른다. 그런 아파트에는 용적률 완화의 인센티브도 준다. 덕분에 과연 수명이 길어질 아파트들이 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축 아파트의 다수는 벽식구조다. 천장이 높으면 공간감이 좋아진다. 그래서 한뼘 층고가 높고 분양가는 훨씬 높은 아파트도 지어지지만 여전히 벽식구조다. 용적률 이외 규제가 복잡한 도심이면 더욱 그렇다. 인센티브가 아직 충분한 유인책이 못 된다는 이야기다.

목숨을 걸고 변화를 거부하겠다는 게 결사항전이다. 우리는 미래변화에 결사항전하겠다는 아파트들을 도시에 늘어놓았다. 재건축 아니면 다음 세대들의 인생을 담을 수 없는 아파트들이다. 빼곡한 다세대, 다가구주택들도 마찬가지다. 나중의 너희들이 건설폐기물 매립하고 석회암산 깎아 콘크리트 제조하고 탄소배출 책임지라는 우리의 사회선언인 셈이다. 50년간 국토를 메워온 여덟 계단 아파트들은 콘크리트로 새긴 그 선언문들이다. 무책임하고 암울한 선언문.

서현 건축가·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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