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은 문장들.. 씩씩하고 다정한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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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쓴다는 건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고 벼리는 일인지 모른다.
가을에 나란히 도착한 황정은과 김혼비의 산문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본능은 할 일 안 하고 거기서 뭐하냐" 같은 김혼비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문장들도 반짝거린다.
운동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축구와 집주인' '거꾸로 인간들'은 김혼비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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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황정은 지음, 창비, 204쪽, 1만4000원
‘연년세세’ ‘디디의 우산’ ‘계속해보겠습니다’ 등을 발표한 황정은은 단단한 팬덤을 가진 작가다. 극도로 문장을 아끼는 작가이기도 하다. 소설 외에 다른 글은 거의 쓰지 않는다. 다른 책에 대한 추천사도 가급적 쓰지 않는다. 2019년 만해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메일 답신을 쓰는 데 사용하는 문장도 아껴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은의 첫 산문집 ‘일기 日記’는 이례적이다. 황정은은 이사한 파주에서 코로나 시국을 견디며 이 글들을 썼다. 글쓰는 체력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고 채식을 하고 식물을 키우고 조카들과 노는 작가의 생활이 엿보인다.
글에서 매우 빈번하게 발견되는 단어는 ‘생각했다’이다. 오래 생각하며 다듬어온 얘기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레 적어놓았다. 그는 사람들을 보면서, 뉴스를 보면서, 책을 읽으면서 ‘저 바깥에 애쓰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 무사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또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 학대받는 아이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생각한다. 이 비극의 구조를, 여기에 우리가 기여한 것들을, 우리 안의 혐오와 차별을 생각한다.
책 뒷부분에 실린 글 ‘흔’(痕)은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한 친족 성폭력에 대한 고백이다. 그는 록산 게이의 책 ‘헝거’에 나오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이란 문장이 이 글을 쓸 용기를 내게 했다고 밝혔다. 또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썼다고 했다.
다정소감, 김혼비 지음, 안온북스, 224쪽, 1만5000원
의외의 소재, 참신한 시각, 유머러스한 문체를 보여주는 김혼비는 요즘 독자들이 사랑하는 에세이스트 중 한 명이다. 2018년 발표한 첫 책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로 주목받은 그는 이어진 ‘아무튼, 술’과 ‘전국축제자랑’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새 책 ‘다정소감’은 일상의 다양한 소재를 다루지만 어느 글을 읽든 뻔하지 않다. 무신경하고 지루한 생각을 뒤집는 힘이 있다. “윤리적 노팬티 상태가 패션인 양 포장되며 쏟아지는 무례한 독설들” “본능은 할 일 안 하고 거기서 뭐하냐” 같은 김혼비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문장들도 반짝거린다.
김혼비의 글은 씩씩하고 다정하다. 그는 단체여행객의 경박성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라고 따져 묻는다. 위선을 경멸한다며 솔직함을 명분으로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 맞서 “정말이지 제발 가식과 위선이라도 떨어줬으면 좋겠다”며 가식을 응원한다.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운동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축구와 집주인’ ‘거꾸로 인간들’은 김혼비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처럼 보인다. 축구를 해서 좋은 점을 하나 꼽아달라는 말에 작가는 “잘 싸우게 됐어요”라고 답한다. “여성들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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