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온라인게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리니지의 역사- 1부
30년이 넘는 한국 게임 시장의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게임 중 엔씨소프트의 리니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디아블로2,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한국의 PC방 문화를 안착시킨 게임이자, 한국 온라인게임의 본격적인 대중화를 시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리니지가 국내 게임 시장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한국 MMORPG(대규모 다중접속 온라인게임)의 핵심인 길드 시스템을 확립시킨 '혈맹' 시스템부터 사냥, 강화 그리고 거래소로 이어지는 한국 온라인 MMORPG(대규모 다중접속 온라인게임)의 경제 시스템의 기틀을 닦은 게임이 리니지다.
특히, 리니지의 '혈맹'은 일반적인 게임의 길드 시스템과 달리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하나의 집단 공동체의 개념으로 발전했으며, 이 '혈맹' 간의 대결인 대규모 '공성전'의 경우 지금도 회자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실제로 '린저씨'(리니지를 플레이하는 게이머를 통칭하는 말)에게 혈맹은 지금도 단순한 길드원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사실.
이러한 독특한 게임성을 바탕으로 리니지는 1998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15개월 만에 국내 최초 온라인게임 100만 회원 시대를 열었고, 단일 게임 최초로 2016년 누적 매출 3조 원을 돌파하는 등 2020년 매출 16조 시장으로 성장한 한국 게임 시장의 교두보를 놓은 작품으로 꼽힌다.
한국 모바일 시장의 성장세를 이끈 게임 역시 리니지였다. 원작 출시 20주년을 맞아 출시된 '리니지M'은 출시 첫날 이용자 210만 명, 매출 107억 원을 기록하며, 이전까지 존재했던 한국 모바일게임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과금 이슈와 최근 운영에 대한 혹평이 들려오고 있지만, 리니지의 IP(지식재산권)를 활용한 최신작 '리니지W'가 글로벌 사전 예약 직후 1000만 명을 모집한 것에 이어 지난 19일 13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리니지가 가진 IP 파워는 단순히 매출로 설명할 수 없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올해로 24주년을 맞은 장수 온라인게임임에도 아직도 국내 게임 시장에서 끊임없이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리니지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서비스를 이어오고 있는 것일까?
리니지의 시작은 엔씨소프트가 갓 태어난 1997년 3월로 돌아간다. 당시 엔씨소프트는 서버 구축 등 인터넷 기술 관련 외주를 받는 조그만 하청 업체로 시작했지만, 국내 최초의 순수 인터넷 기반의 ’네츠고‘ 서비스의 안정적인 구축에 성공하면서 해당 분야에서 실력 있는 회사로 조금씩 입지를 굳혀가고 있었다.
이는 당시 엔씨소프트의 이사였던 김택진 현 대표가 당시 손꼽히는 서버 & 업무용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것도 크게 한몫했으며, 이로 인해 엔씨는 SK, KCC, 금호 등 유수 기업들로부터 수주를 받는 실력 있는 업체로 점차 이름을 높여갔다.
하지만 김택진 대표는 시장 환경에 의존적인 외주 하청업체의 매출 구조를 탈피하는 방안을 찾았고, 그 대안이 바로 당시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으로 IT 산업에 큰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게임이었다.
사실 리니지의 개발을 처음 시작한 곳은 엔씨소프트가 아니라 아이네트라는 회사였다. 당시 온라인게임 개발을 진행하던 아이네트는 경영이 어려워지자 리니지 개발팀을 타 회사로 넘기려 했고, 이 소식을 들은 김택진 대표는 끈질긴 설득 끝에 리니지의 개발자들을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초창기 리니지 개발을 총괄하던 인물이 바로 지금의 XL게임즈의 대표인 송재경이었다. 바람의 나라 등을 개발하며 국내 게임 시장에 온라인게임 장르의 포문을 열었던 송 대표는 당시 개발자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엔씨소프트의 인수와 함께 본격적인 게임 개발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 온라인게임 개발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지금이야 다양한 보조 프로그램과 그래픽 엔진이 존재하지만, 1997년 당시에는 서버 구축, 그래픽 구현과 온라인 환경 구축을 일일이 손으로 구현해야 했고, 이 작업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수준의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에 리니지의 개발 도중 추가 투자를 받지 못하면서 회사 상황이 급속도로 어려워지자 김택진 대표가 자신의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아 직원들 상여금을 지급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1998년 9월 처음 공개된 '리니지' 1차 비공개 테스트의 반응은 그야말로 엔씨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콘솔, PC 게임과 비교해 그래픽을 제대로 구현하기 어려웠던 초창기 온라인게임들과 차별화된 수준급의 그래픽과 다양한 사냥터와 다양한 온라인 콘텐츠를 선보이며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이다.
특히, ‘리니지'는 당시로써는 흔치 않았던 3D로 그래픽을 선 작업한 이후 2D로 변환하는 기술을 도입했다. 비록 이 과정에서 용량이 커져 서버 문제도 곧잘 일어났지만, 수준급의 서버 기술을 지닌 엔씨의 개발진이 뒷받침되어 안정적으로 여러 방향에 맞추어 동작이나 그래픽 이펙트를 구현할 수 있었다.
과금 선택도 중요한 요소였다. 모뎀에서 ADSL로 전환되기 시작했던 인터넷 과도기 시절에는 하이텔이나 천리안과 같은 PC 통신의 서비스 내에 소속되어 부과 사용료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실제로 1997년은 넥슨의 ’바람의 나라‘ 역시 PC 통신 기반으로 서비스됐을 시기였다.
하지만, 김 대표는 통신 수익금의 30%를 내야 하는 당시 PC 통신사들의 정책에 수긍하기보다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로 빠르게 늘어나던 PC방 시장에 주목하며 과감히 PC 인터넷 기반으로 과금체계를 선회했다.
그 결과 ’리니지‘는 PC방 온라인게임의 유료 모델의 틀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게임이 되었다. 당시 엔씨는 '리니지'를 한 달에 30시간 이상 사용한 개인 사용자에게 ’2만 9천 7백 원‘의 월정액 요금제를, PC방에서는 회선당 ’4만 4천 원‘에서 ’6만 6천 원‘의 월정액을 부과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이는 20년이 가까이 이어져 왔던 온라인게임의 PC방 과금 모델이기도 하며, 리니지의 이러한 유료화 정책은 국내 게임 시장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제시하여 다수의 게임사가 온라인게임 개발에 뛰어드는 나비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 끝에 엔씨는 1998년 11월 ’리니지‘의 정식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내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98년 대한민국 게임 대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서비스 1년 만인 1999년에 국내 게임 역사상 최초로 100만 회원을 달성해 국내 게임 시장의 성장에 가속화를 걸었다.
또한, 2000년 밀레니엄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하여 세계 시장 진출에도 나섰으며, 당시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한국 인터넷 정책의 대표적 상징으로 떠올라, 엔씨소프트는 신 IT 사업의 성공 사례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급속도로 성장한 리니지는 의외의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게임의 법적 문제와 온라인게임의 장단점이 한꺼번에 발생하면서 엔씨가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문제에 리니지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당 기사는 한국 온라인게임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리니지의 역사-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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