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시각]'오징어 게임'이 韓 과학계에 던진 과제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지난해와 올해는 한국 문화계에 기념비적인 해로 남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를 정복했다. 해외 언론들은 한류의 인기를 ‘침공(invasion)’에 비유하며 원인 분석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 높은 교육열·민주화·경제발전 등 사회가 성숙하면서 창작의 자유가 보장된 점 등이 한류 콘텐츠 인기의 원인으로 주로 거론된다.
고개를 돌려 과학기술계를 보자. 올해 노벨과학상 수상자 발표가 이달 초 진행됐지만, 한국의 소득은 없었다. 소·부·장 사태로 소원해진 이웃 나라 일본이 1명을 추가(총 25명)한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원인과 대책에 대해 왈가왈부가 많지만 수십 년째 천편일률적인 얘기가 나오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아직 기초과학 수준이 일천해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고, 안정적·장기적 연구를 위한 정부의 지원이 여전히 부족하다. 권위적인 연구 문화가 청년 과학자들의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연구 문화를 질식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부 잘하는 애들은 죄다 의전원(의학전문대학원)으로 간다’는 등 교육 정책의 문제점 및 인재 부족에 대한 호소도 나오고 있다.
모두 맞는 얘기다. 한국 사회 전체가 특히 정부와 과학기술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논의해야 한다. 한국은 최근 드라마 ‘오징어 게임’ 열풍에서 볼 수 있듯 세계를 선도해가는 ‘주요 국가’ 반열에 올라가 있다. 이른바 ‘선진국(developed country)’으로 간주된다. 이를 뒷받침해 지속가능하도록 해주는 게 과학기술이다. 한국은 그동안 문화, 과학기술, 산업,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서 기존 국가들이 경험을 토대로 정답을 만들어 놓으면 그대로 따라가면서 빠르게 추적하는 데 성공해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왜’라는 물음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 국가가 됐다. 노벨과학상 수상은 바로 그것의 척도 중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과제다.
문제는 한국은 여전히 패스트 팔로어에는 익숙하지만, 선도해 나가는 퍼스트 무버 역할은 영 어색하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필요에 의해 경험에 근거해 기술과 학문을 개발하고 응용해 온 나라들에 비해 무작정 도입해서 따라가기 바쁘다. 기초과학을 강화하는 것은 물론, 좀 더 우리 사회의 미래와 가치에 대해 신중한 논의를 통해 공론을 모으고 답을 내놓을 줄 아는 사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 ‘4차산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독일(산업 4.0 백서)을 보자. 독일은 동시에 2년간의 사회적 토론을 거쳐 ‘노동 4.0’이라는 녹서도 작성했다. 기술 발달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총의를 모아 내고 사회 각 주체들이 준비·대응하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4차산업’이라는 말만 따오고 산업적·기술적 대응책만 얘기하고 있을 뿐 ‘사람’은 빠져 있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안주에 빠지는 것이다. 한국은 사실 과학기술 연구개발(R&D)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국가다. 4%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 30조원을 돌파한 정부 R&D 예산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이상한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정치인, 관료, 과학자들이 서로 필요한 것들을 주고 받으며 안이하게 공존하고 생색만 내면서 결과적으로 예산만 낭비하는 늪이다. 정부의 연구개발 과제 성공률이 98%대라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어려운 연구,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 도전적 연구는 하지 않고 성공 확률이 높은 연구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작성되는 대부분의 연구개발제안서의 서식에는 ‘해외 선진 사례’가 포함돼 있다고 한다. 적당히 남들이 앞서간 길을 따라 가기만 하겠다는 거다. 그러니 노벨과학상이 선호하는 ‘가장 중요한 발견’이 가능하겠나. 문화계의 성공을 돌이켜 보자. 우선 정부는 지원만 하고 간섭은 하지 말자. 10년 전 모두에게 거절당했던 오징어 게임 시나리오가 대박을 냈듯이, 어떤 ‘해괴망측’한 아이디어라도 과학자들의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 주자. 그러면 ‘R&D계의 기생충·오징어 게임’이 나오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이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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