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한편의 판타지 소설, 포항이 어떻게 ACL 결승에 갔냐면요..

서호정 기자 입력 2021. 10. 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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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욕 먹어요'라는 표현이 있다. 어떤 극적인 상황이나 예상을 뒤집는 대반전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2021년 10월 20일 포항스틸러스 팬들이 올 시즌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의 상황을 보며 외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한 2021시즌 포항의 행보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 차라리 한편의 판타지 소설이라 표현하고 싶다. 여러 고비와 고난을 넘어 12년 전 선수로서 자신이 밟았던 아시아 정상을 향한 마지막 무대로 다시금 향하는 김기동 감독의 서사는 J.R.R 톨킨이나 J.K 롤링 부럽지 않은 수준이다. 


2년 연속 리그 킹메이커로 존재감을 발휘한 포항이지만, 2020시즌 종료 후 희망적인 소식은 별로 없었다. 구단의 고질적인 채무로 인해 주축 선수들을 팔거나,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김기동 감독이 자신의 재계약을 전제로 강상우, 송민규는 잔류시켰다. 그러나 일류첸코는 전북으로 향했고, 완전 이적을 진작 포기한 팔로세비치도 서울 유니폼을 입었다. 수비의 중심이던 원클럽맨 김광석도 인천으로 떠나 어수선한 겨울이었다. 임대생 최영준도 전북으로 복귀했고, 하창래는 2라운드를 마치고 상무에 입대했다.


신인 선수만 11명을 뽑아서 스쿼드를 채워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신광훈, 임상협처럼 경기력이 회복되면 활약할 수 있는 베테랑을 영입해 당장의 큰 구멍은 메웠다. 김기동 감독의 적극적인 오퍼 속에 5년 만에 포항으로의 복귀를 결정한 신진호도 천군만마였다. 


하지만 팀의 명운을 결정할 외국인 선수 효과가 미미했다. 타쉬와 크베시치는 팀 합류가 늦은데다 자가격리 문제로 개막 후에도 한 동안 나서지 못했다. 본격적으로 기용된 이후로도 중심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 유일하게 잔류한 외국인 선수 팔라시오스는 약속한 동계훈련 일자에 맞춰 오지 않아 빨리 좀 다니라는 의미의 등번호 82번을 받았다. 그나마 호주 국적의 아시아쿼터 수비수 그랜트에게 기대를 걸었는데 인천과의 개막전에서 교체 출전했다가 발목을 크게 다쳐 전반기를 통째로 날렸다. 


K리그 전반기에 포항은 2연승 후 6연속 무승(2무 4패), 3연승 후 4연속 무승부 같은 롤러코스터 행진을 거듭했다. 특히 18라운드까지 19골에 그쳐, 지난 시즌(27경기 56골) 대비 득점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나마도 송민규(7골), 임상협(6골)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일류첸코 이상의 활약을 해 줄 거라던 타쉬는 광주 원정에서 페널티킥 1골을 넣는 데 그쳐 김기동 감독과 포항 팬들의 속을 태웠다.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포항은 올해의 몇 안 되는 행운을 누렸다. 지난 시즌 중국 슈퍼리그에서 우승했지만 모기업의 재정난으로 구단이 공중분해 된 장쑤쑤닝 덕에 플레이오프를 거치지 않고 본선에 직행했다. 하지만 조별리그 통과 과정은 험난했다. G조에 속한 포항은 나고야에게 0-3 완패를 당하고, 랏차부리와 비기는 등 3승 2무 1패를 기록했다. H조의 전북이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감바오사카를 잡아준 덕에 가까스로 16강에 올랐다. 지난 2년 간 포항의 덕을 본 전북이 빚을 갚는 듯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를 마치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전북은 포항의 에이스 송민규를 데려간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브랜든 오닐, 일류첸코를 이적시켜 번 돈으로도 채무를 다 갚지 못하자 포항은 결국 김기동 감독의 페르소나 같은 선수마저 시즌 중 보내고 말았다. 21억원이라는 근래 보기 드문 이적료가 발생했지만, 김기동 감독은 깊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구단이 핵심 선수의 이적 방출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데서 감독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패싱 당했기 때문이다. 김기동 감독은 팀 훈련에 사흘 간 나타나지 않았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포항 팬들은 경기장 안팎과 온라인에서 구단을 향한 거센 비토를 쏟아냈다. 구단의 사과 속에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온 김기동 감독은 "이마저 운명이라면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는 말과 함께 다시 선수단에 집중했다. 


여름이적시장이라는 반등의 기회도 포항에게는 큰 전환점이 되진 못했다. 송민규를 보내고 이상기, 이석현도 전역 후 곧바로 다른 팀으로 갔다. 이현일, 윤석주 등을 임대 보내고 백업 골키퍼 황인재가 입대하며 오히려 스쿼드가 얇아진 모습이었다. 김현성과 김호남을 영입했지만, 훈련 중 부상을 당하거나 재활에 시간이 걸려 즉시 전력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K3리그 부산교통공사와의 연습경기를 통해 눈 여겨 보고 있던 만능 수비수 박승욱이 오른쪽 풀백으로 자리를 잡아 신광훈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용하는 전술적 효과를 동시에 본 것이 소득이었다. 


그 와중에 외국인 공격수 타쉬는 8월 중순 이후 전력 외 선수가 됐다. 처음에는 무릎 부상을 이유로 재활에 들어갔지만, 이후 AFC 챔피언스리그 16강전 등 팀에 공격수가 절실한 상황에도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김기동 감독은 타쉬에 대한 코멘트 자체를 피했고, 선수단 내에서도 남은 시즌 타쉬가 복귀하진 않을 거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김기동 감독도 중앙 미드필더 이승모를 최전방에 세우는 펄스나인(제로톱) 전술로 아예 선회했다. 이승모가 세레소오사카와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한 숨 돌렸고, 신인 공격수 이호재가 33라운드 광주 원정에서 데뷔골을 포함 2골을 터트리며 역전승을 만들며 새로운 호재가 됐다. 


그래도 포항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 5시즌 동안 주전 골키퍼로 팀의 뒷문을 지키던 강현무가 발목 뼛조각이 신경을 건들며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강현무의 공백에 즈음해 리그 4연패에 빠졌고, 그를 대체하기 위해 나선 조성훈과 이준은 잇달아 대형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강현무가 결국 수술대에 오르며 시즌아웃되면서 김기동 감독은 경험이 부족해도 백업 골키퍼들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준이 33라운드 광주 원정에서 2실점을 했지만 실수를 범하지 않았고, 팀도 역전승을 거두며 기나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A매치 휴식기 동안 짧은 정비를 마친 포항에게 챔피언스리그 8강전은 또 한번의 기회이자 위기였다. 조별리그에서 힘겨운 상대였던 나고야에게 다시 한번 무기력하게 패할 경우 파이널A 진입을 위한 마지막 경쟁을 남겨 놓은 리그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김기동 감독은 나고야를 상대로 승부수를 띄웠다. 조별리그 당시 나고야가 경험하지 못한 팔라시오스를 필두로 J리그 최고의 수비진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전반전 수세 상황에서는 이준이 필사적인 선방으로 실점 위기를 넘겼다. 결국 후반 임상협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이승모, 임상협이 다시 골망을 흔들며 3-0 완승, 나고야에게 복수했다. 


운명의 4강전은 울산과의 동해안더비였다. 올 시즌 리그에서 3차례 맞붙어 1무 2패로 열세였고, 나고야전에서 경고를 받은 신진호와 고영준은 뛸 수 없었다. 가뜩이나 없는 스쿼드에서 김기동 감독이 떠 짜낼 묘수가 있느냐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후반기 들어서 잇몸축구를 넘어 임플란트축구로 버틴다는 얘기를 듣던 김기동 감독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 속에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포항의 기본 전략이 허를 찔렀다. 단판 승부에 올인한 포항은 전북과의 8강전에서 연장 대접전을 치른 울산의 체력을 빼는 데 집중했다. 중앙보다는 측면을 중심으로 공격을 전개하며 볼 소유를 최대한 잃지 않았다. 그리고 나고야전에서도 빛난 팔라시오스의 힘과 기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프리롤로 세우며 최전방부터 측면을 가리지 않고 헤집게 만들며 울산 선수들을 초반부터 달리게 만들었다.


전반 초중반 위협적인 공격을 펼치고도 득점을 올리지 못한 포항을 상대로 울산은 후반 7분 선제골을 뽑았다. 이준이 완벽한 캐칭을 하지 못한 사이 집요하게 공을 노린 윤일록에게 실점한 것. 포항의 선전이 여기까지인가 싶었지만 변수는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후반 23분 원두재의 위험한 태클에 레드카드가 나오며 포항은 수적 우위를 점했다. 울산은 수비를 강화하며 리드를 지키려 했지만, 후반 44분 프리킥 상황에서 그랜트가 맞춘 헤더가 조현우를 넘어 동점골로 이어졌다. 


결국 연장까지 갔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양팀은 승부차기로 운명을 갈랐다. 울산은 1번 키커인 불투이스의 실축을 만회하지 못했고 포항은 5명의 키커가 모두 성공하며 올 시즌 가장 큰 승리를 동해안더비에서 만들었다. 2019년과 2020년에 이어 가장 중요한 시점의 승부에서는 포항이 승리를 가져가는 상황이 재현됐다. 명가의 저력과 전통, 감독의 마법이 만나 벌어진 장면이었다. 


포항은 결승전 티켓과 함께 준우승 상금 200만 달러(한화 약 24억원)도 확보했다. 송민규를 이적시키고도 여전히 부채가 남은 것으로 알려진 포항으로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확실한 계기가 마련됐다. 지난 2년 동안 자의든 타의든 김승대, 일류첸코, 송민규를 보내며 막대한 이적료를 안긴 데 이어 부임 후 가장 스쿼드가 약한 시즌조차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며 거액의 상금까지 확보한 김기동 감독의 스토리는 축구판 심청전으로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 


이제 포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알힐랄과의 결승전 단판 승부를 남겨놓고 있다. 이번 대회 내내 그랬지만 결승전 상대는 객관적인 힘에서 앞서 있다. 알힐랄은 바페팀비 고미스, 마테우스 페레이라, 무사 마레가 같은 유럽에서도 기량이 검증된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장현수 역시 아시안쿼터로 수비에서 활약 중이다. 안드레 카리요, 루치아노 비에토, 구스타보 쿠에야르도 상당한 이름값을 자랑하지만, 챔피언스리그의 외국인 선수 기용 제한으로 활용하지 못할 정도다. 완벽한 세대교체 성공으로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B조에서 4전전승을 기록 중인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도 10월 명단 기준으로 6명이다. 레오나르두 자르딤 감독은 AS모나코에서 큰 성공을 쓴 적 있는 지도자다. 게다가 결승전은 적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에서 열린다. 


모든 것이 불리해 보이지만 포항은 한국을 대표하고,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클럽으로 결승전에 나선다. 조별리그를 극적으로 통과한 뒤 토너먼트를 거칠수록 더 강해졌다.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다양한 변수를 극복하며 가장 높은 무대에 도달했다. 뻔한 예상을 깨 버린 조직적인 힘, 감독의 전술과 전략은 어떤 팀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다. 그 자신감을 갖고 나서면 적진에서의 단판 승부는 2021년 포항의 멋진 축구 판타지의 대미를 장식하는 판이 될 수 있다. 2009년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알이티하드를 꺾고 환호했듯이 또 한 번의 마법 같은 순간이 펼쳐질 지 모른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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