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판 지연 줄이려면 법관 임용 문턱 낮춰야

입력 2021. 10. 21. 00:32 수정 2021. 10. 2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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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태 사법정책연구원 원장

누구도 법정에 가는 걸 내켜 하지 않지만, 살다 보면 누구라도 법정에 설 수 있다. 판사에게 억울한 사연을 온전히 전하고 나의 주장을 마음껏 펼치고 싶지만, 현실의 법정은 드라마와 다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판사 개개인이 담당해야 할 사건이 넘쳐나고, 사건보다 판사 숫자가 부족한 것이다.

우리나라 판사는 연간 평균 2000건이 넘는 사건을 떠맡고 있다. 비교적 간단한 소액사건과 약식명령도 있지만, 어느 선진국보다도 살인적인 업무임이 틀림없다. 이 때문에 ‘5분 재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종전까지는 사법연수원을 갓 수료한 젊은 판사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신속하고 능률적인 재판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그런데 “젊은 판사들이 재판을 맡다 보니 사회경험이 모자란다”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른다”는 등의 비판도 끊이질 않았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 법조 일원화 8년, 법관 수급 차질
사건 처리 늦으면 결국 국민 피해

그래서 2013년 사법 개혁 차원에서 ‘법조 일원화 제도’, 즉 일정 경력이 지난 법조인 중에서 법관을 선발하는 제도가 시행됐다. 이 제도에 따르면 올해까지는 법조 경력 5년 이상, 2022년부터는 7년 이상, 2026년부터는 10년 이상의 법조인만이 법관에 지원할 수 있다.

지난 8년간 제도를 시행했더니 법관 지원자 중 10년 이상 경력자가 초기에는 20%, 최근 10% 이하로 떨어지는 문제가 생겼다. 제도가 규정한 대로 법조 경력을 올릴 경우 신규 법관 부족으로 인한 재판 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10년 이상 재야 법조에서 자리를 잡은 훌륭한 법조인이 과연 소득 감소를 감내하면서 격무에 시달리는 법관직에 지원할지 의구심이 든다.

법원을 중심으로 이런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자 대한변협, 한국법학교수회, 로스쿨협의회 등 법조 단체들이 공감했다. 국회에서는 법조 경력을 5년 이상으로 고정하는 개정 법안이 발의돼 지난 8월 말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본회의에서 4표 차이로 부결돼 법조계가 충격을 받았다. 21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된 1호 법안이었다.

법조 일원화 제도 도입 이후 신규 법관 중 대형 로펌 출신이나 재판연구원 출신이 적지 않아서 다양성이나 탈관료화의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우수 인력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뽑아 보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는 법원의 반론만으로는 불신을 온전히 해소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의 법조 일원화 제도는 법관 1인당 사건 수가 훨씬 적고, 배심원이 사실인정의 상당 부분을 떠안고 있으며, 법관 지원자의 인력 풀인 변호사 수가 130만 명이나 되는 환경을 기반으로 한다. 변호사 수가 3만 명에 불과하고 판사가 당사자들의 주장과 판단을 조목조목 판결문에 기재해야 하는 한국에 그대로 접목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매일 벌어지는 수천 건의 재판 현장에서 법정을 주재하고 결론을 내리는 판관을 잘 뽑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의 재판에서 사건의 실체를 향한 조각을 찾아 맞추는 작업은 녹록지 않다. 이를 판결문에 반영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그동안 젊은 법관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어렵게 버텨왔다. 변호사로서 법조 경력이 많아질수록 사회 경험도 풍부해지겠지만, 각종 인연으로 얽히고 사회의 찌든 때에 더 노출될 수 있다는 점도 경계해야 한다.

고매한 인격과 풍부한 사회 경험, 법조인의 능력과 전문성을 모두 갖춘 법관을 선발하는 것은 법원의 임무다. 이를 위해 당연히 노력해야 한다. 다만, 그 당위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매년 필요한 150명 이상의 신규 법관을 충원하지 못해 사건 처리가 많이 지연되거나 열정이 떨어진 법관이 들어온다면 현실의 법정은 더 암울해질 수 있다. 그것은 국민이 원하는 재판 모습이 아닐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 어렵지만 피해서는 안 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기태 사법정책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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