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일의 기쁨과 슬픔

2021. 10. 20.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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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여정 문화평론가


얼마 전, 유튜브 채널 진행을 시작했다. 출판도시문화재단에서 기획한 ‘문발살롱’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이삼십대 여성들과 함께 공감할 만한 주제를 선정해서 책을 중심으로 영화, 공연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는 콘텐츠다. 첫 시작이니만큼 그 이름을 짓느라 여럿이 고민을 했는데, 출판도시가 있는 경기 파주시 문발동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와 ‘문발살롱’이라 이름 붙였다. 오래전부터 이곳은 ‘문발(文發)리’라는 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글이 퍼져나가는 동네라니, 장차 이곳에 책의 도시가 들어설 것을 예견한 걸까.

첫 주제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화제가 됐던 이 책을 모를 리 없었지만 사실 얼마 전 만난 친구의 권유에도 난 심드렁했었다. 문학출판사들의 월간지나 해마다 쏟아지는 수상작까지 챙길 정도로 한국 작가들의 소설을 열심히 읽을 때도 있었지만 어느샌가 내 독서 리스트는 예술과 철학 쪽으로 채워졌다. 간혹 읽는 문학들은 윌리엄 포크너, 존 치버, 돈 드릴로, 커트 보니것 같은 모두 외국 작가의 책이었다. 내 인생에 읽을 수 있는 책이 한정돼 있으니 그 기회비용을 신중히 쓰고 싶었다.

하지만 왜, 지금, 장류진 작가의 책이 읽히는지 그 미덕을 알게 됐다. 책의 말미에 실린 인아영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수호해 왔던 내면의 진정성이나 비대한 자아 대신 객관적인 자기인식, 신속하고 경쾌한 실천, 삶의 작은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지금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 여기 담겨 있었다.

이삼십대를 돌이켜보니 몇 번의 사랑과 이별보다 일을 통해 얻었던 기쁨과 슬픔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 졸업 후 가진 첫 직장은 방송국 막내작가 자리였다. 하지만 브라운관 너머의 세상은 고단하기만 했다. 글 한 줄 써볼 기회는커녕 내가 맡은 일이라고는 잘 모르는 이에게 전화를 걸어 방송 출연을 부탁하는 섭외가 전부였다. 마치 콜센터 직원이 된 것 같았다.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귀찮은 듯 대답을 하다가 갑자기 끊어진 전화가 내는 ‘뚜∼뚜’ 소리에 속이 상해 얼굴이 벌게지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다친 마음을 돌아보기도 전에 선배들의 잔심부름까지 챙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물은 왜 나는지.

그렇게 1년을 그야말로 오기로 버티며 부숭한 얼굴로 방송국을 오가던 어느 날 오후,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주말에 나랑 같이 공연 보러 가.” 그때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공연이 아니라 잠이었다. 그래도 그 친구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워 여차하면 공연 보면서 자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극장으로 향했다. 공연을 본 그날 밤, 나는 사표를 냈다. 이 시간을 버티면 편당 몇 백만원 버는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이 어쩐지 쓸쓸하게 들리기만 했다. 내 이십대의 찬란한 시간들을 그저 이렇게 ‘버티고’ 싶지 않았다.

올해 초 새롭게 받은 연봉계약서에는 ‘16호봉’이라는 낯선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무책임하게 사표를 낸 건 아닐까 고민하던 차에 공연장 공채 1기로 합격이 돼서 환호성을 지르던 순간, 한창 일이 재밌어지고 성과를 내기 시작하던 3년차 무렵, 결혼을 해서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자던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시간, 그리고 번아웃이 왔던 10년차 때 불쑥 영국으로 떠나서 첫 책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를 쓴 뒤 작가라는 이름을 얻었던 벅찬 감정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때론 이불 킥을 하며 회사 욕을 했다가도, 며칠 밤을 꼬박 새우고 다시 새벽을 헤쳐 회사로 가는 첫차에 오르는 게 신이 날 때도 있었다. 그 출퇴근길을 꾸준하게 밟으며 쌓은 시간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 연차가 쌓여가도 여전히 일은 슬픔과 기쁨을 마치 밀당하듯 내놓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게도 당신에게도 일이 선물하는 기쁨만 가득하길, 그런 하루가 되길.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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