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통점 짚은 '푸른 호수'.. "이래도 괜찮은 게 맞아?"

김규종 2021. 10. 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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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저스틴 전의 신작영화 <푸른 호수>

[김규종 기자]

 영화 <푸른 호수> 포스터
ⓒ 유니버셜 픽쳐스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잔잔하지만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저스틴 전이 연출한 <푸른 호수>다. 1981년 출생한 저스틴 전은 한국보다 미국에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저스틴 전은 미국 독립영화계에서 주목받는 감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배우로 출발한 그는 <트와일라잇>(2008), <뉴 문>(2009), <이클립스>(2010) 등에 출연했다.

저스틴 전은 <맨 업>(2015), <국>(2017), <미스 퍼플>(2019) 같은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음으로써 각본가와 감독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다. 지난 10월 13일 개봉한 영화 <푸른 호수>는 2021년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부문과 제74회 <칸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음으로써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영화 <푸른 호수>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안토니오 르블랑.

상당히 낯선 이름이다. 르블랑이란 이름은 괴도(怪盜) '루팡'과 연결되어 있다. 프랑스의 탐정 소설가 모리스 마리 에밀 르블랑(1864~1941)이 그 창조자다. <푸른 호수>의 주인공 안토니오의 성은 르블랑이다. 하지만 그는 깜장 머리에 노란 피부, 갈색 눈동자와 광대뼈가 튀어나온 한국인이다. 어째서 그는 안토니오 르블랑이 되었을까?!

눈처럼 하얀 피부의 여자아이 제시를 데리고 안토니오가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면접을 본다. 그를 응시하는 영사기는 희망과 행복으로 넘쳐나는 젊은이를 잡아낸다. 온몸이 문신투성이지만 그에게서 어떤 악의나 잔인함 혹은 범죄 가능성을 찾아내기 어렵다. 계속 장난치는 제시를 제지하며 면접을 보는 안토니오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진다.

<푸른 호수>는 작은 호수와 사내아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쌍까풀이 없고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젊은 여인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하는 노래가 들린다. 필경 사내애의 어리디어린 엄마의 목소리일 것이다. 이윽고 색동저고리를 갖춰 입은 아이를 물속에 밀어 넣는 여인.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

고작 세 살 나이에 낯설고 물선 아메리카에 와서 하얀 피부와 푸른 눈의 이방인 부모에게 길러지는 안토니오. 그런 안토니오에게 돌연 날아든 강제 추방 통지서. 1988년에 입양된 그가 미국에서 살아온 30년 넘는 세월이 한순간 아무 의미도 없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영화는 이런 정황을 안토니오의 신산한 인생 여정과 결합한다.

캐시와 제시

<푸른 호수>에서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다른 인물은 제시(시드니 코왈스키)와 그의 엄마 캐시(알리시아 비칸데르)다. 어째서 그들은 안토니오와 가족을 이루게 됐을까?! 캐시의 뱃속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아이는 캐시와 안토니오의 소생이다. 초등학생 제시는 동생의 탄생이 달갑지 않다. 아이에게 밀려날 것을 걱정하며 저항하는 제시.

"제시, 네가 날 선택한 것처럼, 나도 널 선택한 거야. 우리는 가족이야!"

영화에서 '선택'이란 어휘는 묵직한 무게를 가진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가족의 개념에서 선택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자식 관계가 아예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토니오와 캐시 그리고 제시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마치 안토니오가 생모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제3인 양부모에게 선택된 것처럼!

캐시는 안토니오의 따뜻함과 자상함을 흉중에 품고 산다. 그녀에게 전남편 에이스는 '선택'의 범주에서 자신들을 제외한 냉혈한으로 각인돼 있다. 따라서 제시가 바라보는 생부의 모습은 엄마의 시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다. 관객이 마주하는 안토니오 일가족의 단란한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정겨운 까닭은 '선택'에 있다.

또 다른 선택

문신(타투)을 해주면서 생계비를 버는 안토니오에게 다가오는 베트남 여성 파커. 그녀는 말기암 환자지만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가는 강인한 여성이다. 그녀의 고단한 행적을 들은 안토니오는 수고료를 거절한다. 파커는 안토니오 가족을 자신들의 파티에 초대한다. 백인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베트남인들의 은성(殷盛)하고 화려한 잔치 한마당.

안토니오는 어떻게 그녀가 미국에 오게 됐는지 궁금하다.

"아버지가 가족에게 두 척의 배에 나눠 타라 하셨어요.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죠!"

파커의 부친에게 그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묻는 안토니오. '전혀 아니'라는 답변을 쉽게 내뱉는 파커의 부친. 만일 그런 선택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배 한 척에 온 가족이 다 탔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라 확신하는 파커와 아버지. 그는 안토니오에게 한국과 베트남의 공통점을 말한다. 전쟁과 그로 인한 파국과 이산의 고통을 전한다.

<푸른 호수>는 백인들의 땅인 미국 남부에서 한국계 미국인과 베트남계 미국인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나아가 왜 그들은 백인들과 섞이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따로 떠도는지 알려준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을 대하는 남부 미국인들의 배타성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대결과 충돌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도 영화는 드러낸다.

저스틴 전의 21세기 신파
 
 영화 <푸른 호수>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영화를 보노라면 곳곳에서 눈물샘이 자극을 받는다. 유리한 방향으로 증언해줄 결정적인 인물을 데려오라는 변호사의 말에도 안토니오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지목한 인물은 그의 양모 수잔. 하지만 안토니오는 그녀를 찾아가지 않는다. 여기서 안토니오와 캐시의 반목과 갈등이 심화한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아내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안토니오에 따르면, 수잔은 숱한 선택의 고비에서 한 번도 안토니오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런 내면의 고통과 상처를 캐시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안토니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내조차 알지 못하는 켜켜이 쌓인 비밀의 장막에 캐시는 질식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과 사랑밖에 없는 캐시의 눈물겨운 하소연은 객석을 신파로 몰고 간다.

저스틴 전이 관객의 눈물을 짜내는 놀라운 능력은 아역배우 시드니 코왈스키에서 정점에 이른다. 작별의 마지막 순간에도 의붓아비와 거리 두던 제시가 느닷없이 소리친다.

"아빠, 가면 안 돼! 가지 마!"

호송하던 경찰을 뿌리치고 제시에게 달려가는 안토니오. 친부를 곁에 두고 의붓아비를 목놓아 부르는 하얀 피부의 제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제시가 그토록 안토니오를 부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피와 살의 섞임을 넘어서는 인간적인 정리와 애틋함일 것이다. 지금까지 꾹꾹 눌러왔던 객석의 오열이 한꺼번에 터지는 놀라운 장면이다.

마치면서

윤여정과 <미나리>를 <푸른 호수>와 견주는 사람도 있다. 부질없는 짓이다. <미나리>는 나름의 미덕이 있고, <푸른 호수>에도 고유한 색깔과 향기가 있다. 윤여정은 없지만, 알리시아 비칸데르가 있는 <푸른 호수>. 거기에도 나름의 인생과 사랑과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푸른 호수>는 많은 눈물과 짧은 웃음이 있는 영화다.

한때는 세계의 용광로로 불렸던 나라 미국. 세계의 인종과 문명과 문화가 하나로 뒤얽혀 거대한 섞어찌개를 끓여냈던 위대한 나라 미국. 그런 미국이 21세기 여성과 문화와 과학기술의 세기에 접어들면서 퇴락하고 있다. '아메리칸드림'이 소멸하고, 각자도생하는 우울한 퇴행을 경험하고 있는 2021년의 세계와 코로나19 여진(餘震)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푸른 호수>는 미국의 통점(痛點)을 통렬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묻는다. "이래도 괜찮은 거 맞아?" 영화 <푸른 호수>는 트럼프가 선택하고, 바이든이 따라가는 미국의 '아동인권법'에 문제를 제기한다. 아울러 고아 수출국 1위의 오명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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