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성차별 패치 떼다②] 고치고 덜어내고..새 옷 입는 소설들

박정선 2021. 10. 19. 14:3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금이 스테디셀러 '너도 하늘말나리야 3부작' 개정판 출간
'죄와 벌' 등 고전도 젠더 개정판 잇따라 출간

가장 오래된 미디어인 책은 가장 느린 매체로 치부되곤 하지만, 이는 편견이다. 책은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데 있어서 그 어느 매체 못지않게 빠르다. 한 예로 할리우드에서 시작한 미투 운동은 출판계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였고, 곧장 페미니즘 서적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교보문고

이후 출판계에서는 성평등 의식이 강조됐고, 아동·청소년 도서에서 그 움직임이 가장 도드라졌다. 아동·청소년기는 사고의 틀이 형성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올바른 성평등 의식을 키우는데 가장 중요한 때다. 그러나 성평등 관련 도서가 별도로 분류되어 있지 않고 양도 적은 것이 현실이었다. 즉 출판계는 아동·청소년들의 올바른 성평등 의식을 ‘독서’로 먼저 배우게끔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당시에 등장한 것이 ‘성평등 어린이책 큐레이션’ 서비스다. 만 3세부터 7세까지 연령별 아동도서를 추천·배송해주는 서비스 ‘우따따’가 문을 열었고, 비영리단체 씽투창작소도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나다움 어린이책’을 선정하고 창작공모전도 실시했다.


국내 아동·청소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이금이 작가는 청소년들로부터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스테디셀러 장편소설 ‘너도 하늘말나리야’와 후속작인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의 개정판을 내놓았다. 불필요하게 외모를 묘사하는 표현, 부계 혈통을 중시하는 가부장제의 잔재 등을 수정하고 덜어내는 작업을 거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뮤지컬로 재탄생되기도 한 ‘유진과 유진’(2004년 출간, 2020년 개정)도 고쳐 썼다. 해당 도서는 아동 성폭력을 다룬 작품으로, 같은 유치원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지만 부모들의 다른 대처로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명의 유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출판사 불티는 “이번 개정과 시리즈화는 단순히 책의 옷을 갈아입히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할수록 개선되고 기준이 높아지는 인권의식과 성인지 감수성에 조응해 달라진 시대감각을 입히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유진과 유진’ 개정판은 기준에 미치지 못했던 표현들을 예민하게 점검하고 바로잡는 데 공을 들였다. 또한 내용은 바꾸지 않는 선에서 문장을 더 쉽고 편하게 읽히도록 상당 부분 손봤고, 세부 설정이나 묘사에서 개연성을 강화하고 한층 자연스러워지도록 일부 보완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작품이 뒤처진 시대감각을 탑재한 오래된 유명 작품이 아닌, 나날이 거듭나는 오늘과 오늘의 고전이 되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밤티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개정판 추진은 아동·청소년 도서에만 그치지 않는다. ‘세계문학전집’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유명한 열린책들은 여성에 대한 비칭을 수정하고, 남자는 반말을 쓰고 여자는 경어를 쓰는 가부장적 번역 등 성인지 감수성에 맞지 않는 번역을 수정해 지속적으로 개정판을 내고 있다. “책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 개정판도 존칭 수정 등을 거쳐 이달 출간할 예정이다.


또 을유문화사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대표작인 ‘제2의 성’을 지난달 전면 재개정했다. 이 소설은 1973년 해당 출판사에 의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48년 만에 오역과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을 바로 잡았다. 이에 따라 해당 소설에 담긴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는 ‘만들어지는 것이다’가 아닌 ‘되는 것이다’고 고쳐 쓰게 됐다.


원작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차별을 개선하는 표현으로 고쳐 쓰는 고민은 분명 긍정적 변화를 이끌 움직임이다. 하지만 출판물은 기록이자, 사료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성인지 감수성에 부합하느냐, 아니냐를 번역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평소 고전의 좋아한다는 독자 김규범(35·남) 씨는 “작가가 직접 성인지 감수성을 담아 개정판을 내는 것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번역에 있어서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고전의 경우는 익숙치않은 문체나, 가치 역시 그 당시의 시대상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라며 “지금의 성인지 감수성에 빗대어 볼 때 아무리 불편한 단어가 있더라도 그건 독자가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문제다.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원문을 통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성평등 그림책 큐레이션 서비스 ‘우따따’를 서비스 중인 딱따구리 유지은 대표 역시 “이야기의 흐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여성혐오 등의 표현을 바꾸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이지만 시대적인 상황이 반영되는 경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성인은 물론, 어린이 입장에서 봤을 때도 무조건 콘텐츠를 수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유 대표는 “그때는 맞았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틀린 그 문장들을 읽어가면서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독자들이 직접 깨달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무조건 문장을 바꾼다고 혐오나, 차별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