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광주에 정착한 고려인의 식탁에 꼭 오르는 '이것'

심효윤 2021. 10. 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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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29)

광주광역시에 고려인 마을이 조성된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 하면 5.18 민주화운동을 빼놓을 수 없는데, 역사적 상처가 너무 깊고 크기 때문에 그 외의 다른 것은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일부는 경제적인 이유로 모국으로 돌아와 이주노동을 하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경우, 2000년 무렵부터 월곡동과 산정동 일대에 고려인이 이주해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곳은 하남공단, 평동공단, 소촌공단 등 산업단지의 배후 주택단지다. 고려인은 대부분 공단에서 근무하는 이주노동자다. 처음 한두 가구로 광주살이를 시작한 이들은 점차 수가 늘어나 현재 7000여 명에 달한다.

고려인 마을에 들어서면 키릴 문자(러시아 알파벳)로 쓰인 간판이 먼저 눈에 띈다. 이색적인 간판과 더불어 화덕에서 갓 구운 빵 냄새가 골목에 가득 풍기면 고려인 마을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주식이자 납작하고 둥근 빵인 ‘레표시카(лепёшка)’를 맛볼 수 있는 가족 카페가 있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사마르칸트 식당, 투르키스탄 식당 등이 있다. 이밖에도 마을에는 우즈베크 출신 고려인 가수 강엘레나씨가 운영하며 마을 아이들이 전통춤과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강엘레나무용학원도 보이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식료품을 살 수 있는 마트, 이동통신사 가게, 미용실 등 생활에 필요한 각종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고려인 주민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지원해주는 시설도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고려인종합지원센터는 한국어 통역 및 교육, 숙식과 취업 알선 등과 같은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며, 이밖에도 고려인마을협동조합, (사)고려인마을, 고려인교회, 어린이집, 지역아동센터, 바람개비 꿈터 공립지역아동센터, 청소년문화센터, 광주새날학교 등이 있다. 최근에 고려인의 삶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월곡고려인문화관 ‘결’도 개관했다(2021년 5월 개관).

광주 고려인마을 풍경. [광주대학교-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음식을 보면 차이점이 먼저 눈에 띈다. 고려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식문화가 혼합된 현지식을 즐겨 먹는다. 치즈, 버터, 우유 등의 유제품이 냉장실을 가득 채우고 있고, 쿠키나 빵에 버터를 바르고 소시지를 얹어서 뜨거운 ‘차이(чай, 홍차)’ 한 잔을 즐긴다. 뿐만 아니라 카자흐나 우즈베크의 전통 음식과도 혼종된 상차림이 흔하다. ‘베스바르마크(бешбармак, 고기를 넣은 수제비)’, ‘샤실리크(шашлык, 양고기 꼬치구이)’, ‘플로프(плов, 기름볶음밥)’ 등 우리에겐 낯선 음식을 먹는다. 부엌의 오븐에서는 레표시카와 ‘삼사(самса, 고기파이)’라는 생소한 빵을 구워 먹는다.

우리가 밥과 반찬을 같이 먹듯, 중앙아시아에서는 레표시카라는 빵을 반찬이나, 수프, 메인 요리와 함께 먹는다. [광주대학교-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레표시카는 중앙아시아에서는 주식으로 귀하게 여겨지는 빵이다. 우즈베키스탄에는 레표시카를 만들기 위한 화덕인 ‘탄두르(тандыр, 점토로 만든 원통형의 항아리 가마)’가 따로 있을 정도다. 레표시카는 일상 음식뿐만 아니라 돌잔치나 환갑잔치, 장례식 등 고려인의 일상 의례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고려인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씨(남, 66세)도 레표시카를 신성한 음식으로 여긴다.

“레표시카는 주식입니다. 밥 대신 레표시카와 차이를 마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레표시카는 귀중한 음식으로 여겨집니다. 던져서도, 버려서도 안 되고, 칼로 썰지 않고 손으로 뜯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큰 어른이 레표시카를 작게 뜯어서 나눠주셨지요. 요즘은 그냥 그릇에 뜯어놓은 채 레표시카를 넣어두고 가족 모두가 먹습니다.”

우리가 밥과 반찬을 같이 먹듯, 중앙아시아에서는 레표시카를 반찬이나, 수프, 메인 요리와 함께 먹는다. 고려인은 반세기 넘도록 중앙아시아에 살면서 현지식을 먹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밥상에는 쌀밥뿐 아니라 레표시카도 주식으로 올랐다.

플로프 역시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즐겨 먹는 기름볶음밥이다. 볶고, 끓이고, 찌는 세 가지 요리 방식이 들어간 음식이다. 공들여 만드는 만큼 양에 따라서 차이가 나겠지만 조리하는 데 보통 2시간이 넘게 걸린다.

플로프는 잔칫날에 손님에게 대접할 때 요리하는 필수 음식이다. 일반적으로 야외에서 커다란 솥에 오랜 시간 동안 대량으로 만들기 때문에 보통 남자들이 직접 요리한다.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까지 대접하기도 한다. 그래서 “플로프가 나오지 않으면 잔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기름볶음밥 플로프. [광주대학교-아시아문화원 컨소시엄]


중앙아시아 지역에 쌀농사가 보급되기 전에는 쌀 수확량이 많지 않아서, 잔칫날에나 구경할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고 한다. 고려인 덕분에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플로프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혹독한 중앙아시아의 날씨에도 벼농사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쌀농사의 북방한계선 위도를 2도나 끌어올린 기적을 일구었다.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고려인에게도 플로프는 다른 현지 음식에 비해 비교적 쉽게 수용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플로프는 인디카 쌀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가 흔히 ‘안남미’라고 부르는 쌀로 장립종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도 여러 벼품종을 개발했는데, 카자흐스탄에서 ‘카라탈(알마티주)’, ‘크라스노다르(크즐오르다주)’ 등이 재배되었다. 고려인은 가장 맛있고 비싼 ‘경조쌀(우즈베키스탄 벼품종 개량 전문가인 박경조가 개발한 벼종자, 폴리트오트젤 경조)’로 만든 플로프를 최고로 여겼다고 한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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