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의 시시각각] 제왕적 대통령, 우리 안의 전(前)근대 유산

예영준 2021. 10. 1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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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권력은 무소불위라는 착각
아직도 남아있는 '대통령=왕' 인식
8번째 직선에서 모두 청산해야
국민의힘 대권주자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달 1일 TV토론회 때 손바닥 한가운데에 '왕(王)'자를 그려놓은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중앙포토]

윤석열 후보가 손바닥에 적힌 글자 한 자 때문에 호되게 곤욕을 치렀다. 이 소동을 보면서 새삼 깨달은 게 하나 있다. ‘대통령=왕’이란 전근대적 인식이 우리 의식 속에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이다. “지지자가 써 준 것”이란 해명이 사실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윤 후보 극성 지지자들만의 예외적 인식이라 하기도 힘들다. 왜? 우리 현실에서 대통령은 곧 제왕이기 때문이다.

1년쯤 전에 민주화 운동 경력을 훈장처럼 여기는 여당 정치인이 문재인 대통령을 태종에 비유했다. 그러자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지난 3년 동안 태종의 모습이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라고 한술 더 떴다. 용비어천가 뺨치는 낯 뜨거움은 별개 문제다. 태종·세종이 훌륭한 왕이라 해도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을 전제 군주에 비유하는 발상부터가 잘못이다. 이런 말을 듣고 문 대통령이 야단을 치거나 주의를 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비유적 표현에 불과한 걸 말꼬리 잡는 게 아니다. 실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가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 혼란스럽게 한다. 공직자들이 줄줄이 기소된 월성 원전 타당성 평가 조작 사건의 발단이 그렇다. “언제 중단할 생각이냐”고 대통령이 묻자 장관이 부하 관료에게 호통을 쳤고 그 결과는 일사천리였다. TV 사극에서 보던 장면과 판박이 아닌가. 그나마 사극에는 “아니 되옵니다”고 직언하는 신하라도 있다.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선거 캠프에서 크고 작은 일을 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나눠 주는 인사는 군왕이 공신들에게 행하던 논공행상과 무엇이 다른가.
문재인 정부의 실세들이 유독 즐겨 입에 올리는 말이 ‘선출 권력’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은 선출된 권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이야말로 ‘대통령은 곧 제왕’이란 발상의 소산이다.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이 권력을 위임받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그들은 이를 근거로 대통령이 하려는 일에 반대하는 것을 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것인 양 몰아세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선거로 위임받는 권력과 권한은 제왕이 갖는 무소불위의 것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도 법의 제한을 받고, 법 이전에 사회 구성원의 암묵적 합의와 양식에 맞게 절제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선출 권력을 들먹이는 자들의 발언 뒤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억울하면 선거에서 이겨 보시든가.”
대장동 의혹에 휩싸인 이재명 후보에게 남은 길은 오직 하나,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은 왕이다. 감히 누가 왕의 전비(前非)를 묻는단 말인가. 더구나 임기가 시작되면 법적으로도 형사소추 면제를 보장받게 된다. 단군 이래 최대의 불공정 특혜 의혹을 단군 이래 최대의 공공 환수로 둔갑시키고 상대 진영의 게이트로 몰아붙이는 프레임 전술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만일 TV토론 등 선거 과정에서 거짓 진술을 하면 선거법 적용 대상이 된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인을 수사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자는 개헌을 해야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폐해들은 제도 이전에 운용의 문제이고, 그 근원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정치문화의 문제가 있다. ‘대통령학’ 권위자 함성득 교수의 말은 이렇다. “한국의 대통령제는 결코 제왕적 대통령제가 아니다. 다만 옛날 황제처럼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제왕적 대통령이 있었을 뿐이다.” 어느덧 우리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8번째 대통령을 뽑는다. 자랑스럽지 못한 전(前)근대적 유산인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을 이제는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낡은 관념부터 털어내야 한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물론이고 대통령을 뽑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유권자는 신민이 아니다.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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