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초연해진 여인, 홍상수가 말하는 삶이란
[장혜령 기자]
▲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포스터 |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오래 전 미국으로 떠난 상옥(이혜영)은 최근 한국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동생과 재회하기도 했고, 한 중견 감독을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상옥은 요즘 하나뿐인 동생 정옥(조윤희)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둘은 자매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다. 언니가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미국에서 잘 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새로운 발견이 계속된다.
▲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 |
ⓒ (주) 영화제작전원사 |
느긋하게 자고 나서 브런치 먹으러 근처 빵집을 찾아갔다. 정말 맛있는 음식에 감사하고 가까운 미래도 그려본다. 그러고 나서 공원도 산책하고 사진도 찍으며 소소한 일상을 함께 보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아쉬운 오늘이 속절없이 저물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천천히 일상 하나하나를 누리고 싶지만 상옥에게는 시간이 없다. 상옥은 사실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부터 많은 것을 숨기고 들어왔다. 오전부터 시작된 빵집 투어와 신축 아파트 구경, 조카의 가게를 둘러보고 예전 살던 집을 찾아 과거를 추억했다. 유년 시절에 살던 집은 다행히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다녀온 기분이다. 어릴 때 잠깐 연기했던 게 다인 잊힌 배우. 한국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공원에서 알아봐 주는 행인이 있었다.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
오후에는 한 영화감독(권해효)과 어렵게 보기로 약속했다. 귀국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던 건지 영화 출연 제의를 해왔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계속되는 구애에 마지 못해 만나는 거다. 하지만 막상 만나보니 말이 잘 통한다. 숏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젊었던 내 모습을 기억해 주고 있다. 술을 진탕 마셨고 비가 오니 괜한 감상에 빠져들었다. 말도 안 되는 대화를 주고받다가 '사랑의 인사'를 어설픈 기타로 연주하기도 했다. 장편 영화를 거절하고 단편 영화는 승낙했다. 도망치듯 떠난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죽음을 생각하니 삶이 가까워 지더라
홍상수 감독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후 죽음을 자주 논한다. 이번에는 아예 시한부 설정으로 종교적이기까지 한 삶의 감사를 노래한다. 그래서일까. 상옥은 세속적인 짐을 모두 내려놓았다. 이를 모르는 동생이 아파트값이 올랐다며 언니도 한 채 사서 정착하라고 말할 때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달관한 상옥의 기운은 영화의 가장 큰 인장이다
이후 조카의 떡볶이 가게에 갔다가 국물을 옷에 흘렸을 때도 갈아입을 생각을 잠시 했을 뿐, 다음 약속 장소로 직진했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술집에서 나눈 시시콜콜한 대화에서도 엿보인다. 당장 내일이라도 영화를 찍자고 말하던 감독은 그 말이 곧 지킬 수 없는 약속임을 공지한다. 상옥은 그 앞에서도 그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여기고 웃고 말뿐이다. 욕망 없는 인간의 텅 빈 슬픔과 인생의 마무리는 동시에 보여준다.
▲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컷 |
ⓒ (주) 영화제작전원사 |
오랜만에 등장한 이혜영 배우는 시한부 연기마저도 카리스마 가득하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배우와의 호흡도 조화롭다. 김민희가 없는 홍상수 영화지만 공기처럼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법한 분위기가 감돈다. 여성이 주체와 객체가 되어 바라보는 시각의 유연함이 살아 있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이 나이 듦에 따라 세상과 마주하게 될 용기와 포부일지 모른다. 쓸쓸하고 서글프지만 추하지만은 않다. 세상에 태어나 늙어가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이는 해탈이 깔려 있다. 자연의 일부로서 어쩔 수 없이 사라지는 존재임을 직시하라고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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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와 키노라이츠 매거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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