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울산의 전북 트라우마 깨기, 홍명보 감독의 완벽 설계가 빛났다
[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2021년 1월 7일 울산현대의 제11대 사령탑으로 취임한 홍명보 감독의 가장 큰 숙제는 우승이었다. 그 우승으로 가기 위해 넘어서야 할 최대 장벽은 숙적 전북현대였다. 2019년과 2020년 모두 전북 트라우마를 넘지 못해 K리그와 FA컵에서 좌절한 상황이었다. 홍명보 감독도 "우승으로 가기 위해선 전북을 넘어서야 한다. 중요한 고비에서 일치된 목표 의식을 갖는 위닝 멘탈리티, 책임감 등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9개월이 훌쩍 지나 홍명보 감독은 취임 첫 해부터 그 약속을 완벽하게 지켜냈다. 이미 K리그에서 3차례 격돌해 1승 2무의 우위를 점했던 울산은 AFC 챔피언스리그 8강 단판전에서 다시 전북을 만났다. 리그에서 양팀이 승점 1점 차의 박빙인 상황에서 챔피언스리그의 승패는 시즌 전체의 경쟁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승부였다.
그 중요한 맞대결에서 울산은 또 한 번 승리를 거뒀다. 경기는 치열했다. 바코의 선제골을 한교원이 동점골로 쫓아왔다. 윤일록의 골로 다시 울산이 앞서가자 전북은 쿠니모토의 왼발로 2-2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연장 전반 터진 이동경의 환상적인 왼발 중거리슛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전북은 종료 직전 구스타보의 슛이 골대 옆으로 빠져나가며 홈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그라운드 안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은 선수들의 역할이지만, 경기 전체를 설계하고 중간에 교체 카드와 전술 변화를 통해 보수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홍명보 감독은 이런 부분에서 빈 틈 없는 통제로 울산의 전북 트라우마 깨기를 이끌고 있다.
우선은 정보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빛났다. 이번 맞대결에서 최대 변수는 부상으로 인한 선수단 컨디션 관리였다. 울산은 9월에 원두재, 이청용이 부상을 입어 리그 경기에서 빠졌다. A대표팀에 차출됐던 김태환과 이동준도 각각 부상을 안고 돌아왔다.
그 중에서도 원두재와 이청용의 출전 여부가 관심사였다. 올 시즌 전북은 백승호가 주전으로 자리 잡기 전까지 중원 싸움에서 울산에 번번이 밀렸다. 원두재의 역할이 컸다. 그의 출전 여부에 따라 울산은 중원 활용의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청용은 공격의 윤활유 같은 역할이다. 바코도 위협적이지만 이청용이 투입되고 나서의 섬세한 연계 플레이의 질이 달라진다.
대표팀 소집 후 3일 만에 종아리 부상으로 팀에 복귀한 김태환은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아 정상 출전이 가능했다. 반면 햄스트링 근육 미세 파열의 이동준은 명단에 들기 어려웠다. 여기까지는 전북에서도 확인하고 있었던 정보였다.
미지수는 원두재와 이청용이었다. 홍명보 감독은 외부에 두 선수의 상태를 철저하게 숨겼다. 경기 전날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1~2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말로 관련 질문에 답했다. A매치 휴식기 전만 해도 원두재는 무릎 부상으로 10월에도 출전이 어려울 수 있다는 역정보를 흘렸다. 원두재 역시 인터뷰 등에서 자신의 정확한 몸 상태를 밝히지 않았다.
이청용도 A매치 휴식기 전 홈 경기에서 발목 부상으로 인해 보조기를 찬 모습으로 등장해 우려를 샀다. 하지만 최대한 빠른 회복을 위한 조치였었다. 이청용은 전주로 떠나기 사흘 전부터 팀 훈련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원두재는 전북전에 선발 출전했고, 홍명보 감독의 최후의 카드로 고려했던 이청용은 연장 전반에 출전했다. 66분을 소화한 원두재는 경기 초반 흐름에서 밀리지 않는 중원의 축이 됐고, 이청용은 30분 가까이 뛰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
전술적으로도 큰 그림의 설계와 경기 중 대응 양면에서 거의 완벽한 모습이었다. 이동준의 결장과 이청용의 긴 활용이 어려운 상황에서 홍명보 감독은 2선 조합을 바꿔버렸다. 좌우에 윤일록와 바코를 세우고 중앙에 윤빛가람을 배치했다. 윤빛가람은 후반기 들어 이동경에게 밀린 상황이었지만, 이날은 전반전에 가장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 준 울산 선수였다. 바코는 전북의 초반 압박과 라인 형성이 느슨한 틈을 타 완벽한 솔로 플레이로 선제골을 만들었고, 윤일록도 팀의 두번째 골을 넣었다.
A대표팀에 다녀온 선수들도 냉정하게 활용했다. 시리아, 이란전에 모두 선발 출전해 체력적인 소모가 컸던 홍철 대신 좌 설영우, 우 김태환의 풀백 조합을 가동했다. 시즌 내내 왼쪽과 오른쪽을 오가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제3의 주전 풀백 설영우는 이날도 맹활약을 펼쳤다. 이동경은 후반에 원두재를 대신해 투입됐고, 이날 승부를 결정 짓는 득점을 만들었다. 후반기의 흐름 그대로라면 이동경이 선발 출전하는 걸 예상했겠지만, 홍명보 감독은 경기에 대한 계획을 설명하고 슈퍼 서브 역할을 맡겼다.
가장 중요한 선택은 원두재와 박용우의 투 볼란치였다. 홍명보 감독은 최근 자리를 잡은 전북의 4-1-4-1 전술을 어떻게 누를지 고민했다. 압박과 공간 점유, 그리고 세컨드볼 싸움이 관건이었다. 전북이 한교원, 송민규, 김보경 등이 하프스페이스를 파고 드는 것을 최대한 억제해야 했는데 포백 앞에 원두재와 박용우를 세워 그 공간을 줄였다. 그 결과 전북은 전반에 한교원의 침투에 의한 득점 장면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전북의 전통적인 공격 방식인 전방으로 빠른 공 투입 후 세컨드볼을 점유해 몰아치는 것도 투 보란치를 통해 밀어냈다.
원두재가 부상으로 빠진 동안에도 홍명보 감독은 박용우, 윤빛가람, 김성준, 신형민으로 여러 조합을 짜며 3선 벽을 두텁게 하는 준비를 했다. 대구, 수원FC 등 빠른 카운터 전략을 지닌 팀을 상대하는 한편, 챔피언스리그와 K리그에서 펼쳐질 전북전 대비 차원도 있었다. 결국 올 시즌 포항전에 한 차례 가동했던 원두재-박용우 조합이 다시 낙점 받았고 두 선수는 전반전 우위를 가져오는 숨은 주역이 됐다.
전주성의 대혈전에서 거둔 3-2 승리는 역사의 나침반을 바꾼 승부일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극명하게 다른 위상에 있던 울산과 전북은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4강전을 기점으로 운명이 뒤바뀌었다. 당시 원정 1차전에서 3-2로 승리한 울산은 홈에서 1-4 패배를 당하며 결승행 티켓을 전북에게 내줬다. 전북은 결승에서 시리아의 알 카라마를 꺾고 아시아 정상에 올랐고, 그 성과를 발판으로 K리그에서도 왕조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긴 시간 리그 우승에서 멀어졌던 울산은 정상 복귀를 외치며 지난 수년간 전북 못지않은 투자를 했지만 오히려 지난 2년 연속 전북 트라우마에 밀려 K리그 우승을 눈앞에서 놓쳤다. 올 시즌 리그에서 전북에게 패하지 않으며 우승을 위한 주도권을 거머 쥔 울산은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중요한 승리를 챙겼다. 2008년 이후 13년 만에 전북과의 시즌 전적에서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트레블(3관왕)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갔다.
사진=풋볼리스트 서형권 기자,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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