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⑲] 선한 인상의 배우가 '늦은 밤' 악역을 만났을 때
종종 하는 말인데 캐릭터는 배우에게 빚진다. 배우의 색과 향을 만나, 배우의 옷을 입고 생생한 인물이 된다. 그래서 다채로운 캐릭터만큼이나 다양한 배우가 존재하고, 보는 이들은 캐스팅이 ‘딱’이네 어울리지 않네 하며 배우와 캐릭터의 ‘궁합’을 말한다.
물론 괴물 같은 연기력의 배우들은 선역과 악역을 자유로이 오간다. 하지만 그럴 때도 선해 보이는 배우가 악인을 연기하면 연민의 지점이 묻어나고, 강한 인상의 배우가 착한 사람을 연기하면 강단이 캐릭터에 드리운다. 양에 음이, 음에 양이 드리우고 보태지며 배우의 수보다 훨씬 많은 캐릭터가 가능해진다. 게다가 선과 악, 어느 쪽도 쉽사리 드러내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배우들의 광폭 스펙트럼까지 더해지면 우리는 별처럼 숱한 캐릭터를 만날 기회를 얻는다.
어느 쪽의 배우가 더 대단한가를 논할 수는 결코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중립의 이미지를 고수하는 배우들이 작품마다 변하는 색채와 새로이 쓰는 가면을 즐기고, 선한 인상의 배우가 선과 악의 캐릭터에 보태는 햇살을 선호한다.
영화 ‘크루엘라’를 보며, 엠마 스톤의 ‘가다가 멈추는’ 악역 연기를 보며(당초 설정이 절정의 악역 조커가 아닌 영향도 한몫), 엠마 톰슨의 무게감 있게 앙칼진 악인 표현에 마음을 빼앗겼다. 제대로 빌런 역할을 하는 바로네스를 보며 쾌감을 느꼈다. 선한 눈매를 지닌, 어린이들에게 재미난 이야기보따리를 푸는 ‘호호아줌마’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엠마 톰슨이 뼛속 깊은 악한으로 분하니 쾌감이 배가됐다.
엠마 톰슨의 악역 연기를 좀 더 보고픈 마음에 국내 개봉한 적은 없지만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레이트 나이트’(감독 니샤 가나트라, 2019)를 선택했다. 20년 넘게 심야 토크쇼를 단독으로 지켜온, 스탠딩 코미디의 대가 캐서린 뉴베리 역을 맡았다. 시청률의 하락과 함께 프로그램이 폐기될 위기에 처했음에도 혼자만 모를 정도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고,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작가진 등 타인에게서 원인을 찾을 만큼 자만심도 넘친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작가들을 달달 볶기 시작하는데. 그동안 늦은 밤(레이트 나이트, Late Night) 생방송 스튜디오에는 작가 팀장과 메인 작가 딱 2명만 출입했기에 이미 나갔거나 심지어 병사한 작가를 찾기도 할 만큼 같이 일하는 동료에게 관심도 없는 인물이 캐서린이고, 느슨했던 타성에 젖어 위기 상황에 빨리 몰입하지 못하는 작가가 적응할 틈도 없이 쫓아내기도 한다. 이름을 부를 필요도 못 느껴 자신의 편의를 위해 1번에서 8번으로 작가를 부르고, 대놓고 면박 주는 걸 일삼는 ‘안하무인’의 표본이다.
실력만 있으면 실력 없는 상대를 함부로 대해도 되고, 성과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다는 식의 태도. 실력지상주의와 결과지상주의로 똘똘 뭉친 캐서린에게 당신의 실력이 예전 같지 않고, 현재 어떠한 결과도 못 보여주고 있다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서슬 퍼런 해고의 칼을 쥐고 있고, 먹고사는 건 누구에게도 가볍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영화는 캐서린의 적수로 8번 작가를 세운다. 화학공장 직원이었던 몰리 파텔(민디 캘링 분)은 사내 수필대회 1등 수상의 부상 격으로, 회사가 대주주인 방송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의 작가가 될 기회를 얻었는데. 어릴 적부터 한 회도 빼놓지 않고 즐겨봤던,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던 시절의 캐서린이 진행하는 ‘레이트 나이트’ 쇼를 택한다. 타이밍이 좋아서, 백인 남성 일색의 작가진에 ‘여성에 유색인’을 다양성 차원에서 배치하고 싶다는 캐서린의 허락 덕에 무사 입성한다.
진지한 철학적 선택이 아니라 시류에 맞춘 단순 아이디어였는데, 일이 되려니 솔직 당당한 몰리의 직진 덕에 심야 토크쇼에는 활기가 깃든다. 하지만, ‘그래서 쇼는 살고 캐서린은 개과천선했대요’로 끝나면 정말 재미없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자세히 전할 수 없지만, 캐서린과 몰리 그리고 작가진 앞에는 두 가지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는 강력한 적수, 하나는 일생일대의 스캔들, 모두 캐서린이 해결해야 할 난제다.
산 넘어 산 격의 고난을 캐서린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건 우리도 이제 다 안다. 관람 포인트는 과연 ‘어떻게’이다. 그 해결책 또는 혜안은 캐서린의 ‘레이트 나이트’ 쇼 생존에만 국한하지 않고 결국 우리가 우리네 인생에 적용할 수 있는 무엇일 수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난관 앞에서 정공법을 택한다. 더 중요한 건 그 정공법을 실행하는 태도다. 명장면도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긴장감 넘치면서도 대단히 솔직해서 멋진, 그래서 공감의 웃음이 가능한 스탠딩 코미디 장면을 놓치면 아깝다.
다시 배우와 캐릭터의 관계로 돌아와서. 엠마 톰슨은 성공과 매너리즘이 어떻게 사람을 망쳐놓는가를 보여주는 안하무인 연기를 차지게 소화했다. 역시 연기력 최고다. 그런데 영화는, 뼈저린 반성과 눈물 어린 후회 속에 갑자기 캐서린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매우 현실적이다. 그러면서도 캐릭터의 반전, 영화 스토리의 반전을 급격히 만들어야 하는 숙제가 엠마 톰슨에게 주어졌다. 자칫 영화 ‘레이트 나이트’는 용두사미가 될 상황에 직면한다.
이 대목에서 엠마 톰슨이 지닌 선한 인상, 올곧아 보이는 이미지가 큰 몫을 한다. 애초 나빴던 게 아니라 인기와 성공의 단맛에 젖어 초심을 잊고 옹고집 독재자가 됐지만, 특별한 계기를 통해 빠르게 각성하고 달라질 수 있음을 엠마 톰슨이 연기했기에 설득이 된다. 스토리 구조의 허점, 급히 마무리하는 무리수를 무리 없게 만든다. 각본과 연출의 구멍이 배우에 의해 메워지는 순간이다.
‘레이트 나이트’는 얼핏 미국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의 방송계 버전으로 보인다.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 역의 매릴 스트립을 전설의 심야 토크쇼 진행자 캐서린 역의 엠마 톰슨으로 바꾸고, 그를 모시는 여자 후배를 앤디 역의 앤 헤서웨이에서 몰리 역의 민디 캘링으로 바꾼 격이다.
제작 연도 13년 차가 나는 두 영화를 보면 시대변화를 빠르게 포착하는 할리우드영화를 통해 드러나는 미국의 트렌드 혹은 평균 의식을 읽을 수 있다. 2006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는 마치 심야토크쇼 ‘레이트 나이트’의 작가진처럼 주인공 모두가 백인이고, 양성평등 의식의 확산 속에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던 흐름이 엿보인다. 그리고 2019년 작 ‘레이트 나이트’에서는 여성 주인공인 것은 같되 한 명은 인도계의 짙은 피부색(민디 캘링 분의 몰리), 다른 한 명 역시 백인이되 영국에서 건너온 이주민(엠마 톰슨 분의 캐서린)이다. 다양성을 담지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는 최근 경향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레이트 나이트’의 작가가 주연배우 민디 캘링이고, 감독 니샤 가나트라 역시 인도계 여성인 영향도 있을 터이다.
실제로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심야 토크쇼를 장기 진행해 본 것처럼 연기하는 엠마 톰슨, 자연인 엠마의 선한 인상을 잊게 하는 철면피 카리스마 연기는 챙겨 볼 만하다. 실제 코미디언이기도 하고 배우이기도 한 작가 민디 캘링의 유머 역시 즐길 만하다. 직접 쓴 걸 스스로 연기하니 매끄럽기가 그지없다. 향후 승승장구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드라마 ‘오피스’에 이어 미리미리 친해 둘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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