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큐를 만드는 이유 #국가대표 #이은규PD

전혜진 2021. 10.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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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곳곳에 빛을 밝히려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이은규PD가 얘기하는 지금의 여성, 여성 다큐멘터리.
이은규가 입은 수트와 셔츠는 모두 Sy2c. 슈즈는 H&M X Simone Rocha.

이은규

87년생. KBS 8년 차 PD. 최근 〈다큐 인사이트〉 시리즈를 통해 개그우먼과 배우 윤여정, 여성 운동선수까지 직업인으로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시리즈 아카이브를 선보이며 큰 호평을 받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KBS1 〈국가대표〉 카메라 앞에 선 박세리, 김연경 등 여성 스포츠 선수들.
이은규 PD가 연출한 여성 아카이브 시리즈 중 여성 희극인을 조명한 〈개그우먼〉.이은규 PD가 연출한 여성 아카이브 시리즈 중 여성 희극인을 조명한 〈개그우먼〉.

Q : 지난 8월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국가대표〉(이하 〈국가대표〉)는 출전 선수 48%가 여성으로, 역대 가장 높은 성비를 기록한 2020 도쿄올림픽의 흥행과 함께 큰 사랑을 받았다

A : 땀 흘리는 여성에 대한 존경심에서 출발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 파견 나갔을 때 여성 스포츠 경기를 비로소 가까이서 봤다. 포효하고 투지 넘치는 모습이 강렬했다. 외모나 경기력 외의 부분으로 여성 스포츠인이 평가되기보다 오로지 실력과 존재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 스포츠 스타의 탄생이 공감과 호응의 배경이 된 것 같다. 시청자 또한 스포츠 분야의 젠더 이슈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듯하다.

Q : 스포츠계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 배제에 관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작업은 꽤 조심스러울 듯하다. 더 넓은 층의 시청자를 아우르기 위해 택한 방식은

A : 젠더 이슈를 다루면 충분한 배경 지식으로 편견 없이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청자가 있는 반면 “저게 문제가 돼?”와 같은 시선과 발화자의 목소리를 하소연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가장 설득력 있게 주제의식을 전할 방법을 고심했다. 당사자들이 경험한 일을 직접 꺼내고, 사실 기반의 푸티지를 중심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것이 마음을 열게 할 방법이자 가장 객관적으로 이슈를 받아들이게 할 방법이었다. 제작진이 제3자로서 그들을 평가하는 방식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Q :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기꺼이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 선 김연경, 박세리, 지소연 등 선수들은 섭외에 흔쾌히 응했나

A : 개인 이름으로 다큐멘터리라는 무게감 있는 미디어에 얼굴을 내미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미, 송은이, 김숙 등 여성 희극인들의 목소리를 내세우며 지난해 6월에 방영된 〈다큐 인사이트-개그우먼〉(이하 〈개그우먼〉) 팀도 마찬가지로 직군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한마디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참여해 줬다. 자신이 속한 직업과 공동체에 대한 애정 어린 태도를 품고.

Q : 제작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쓰거나 우려했던 부분은

A : 사실 〈다큐 인사이트〉 주 시청자층은 60대다. 혹여나 젠더 이슈와 관련한 배경 지식이 없는 분들도 납득할 수 있고, 흐름을 따르기에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김연경, 박세리 등 메시지의 대표성을 지닌 이들이 존재했기에 기획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추가 설명 없이 존재만으로 메시지가 납득 가능할 만한 인물들이고, 그들의 서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주제의식이 드러났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여자 배구가 남자 배구 뒤편의 보조 경기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나 배경 지식을 꼼꼼하고 논리적으로 엮어나가는 데 집중했다.

Q : 스타일리시한 자막이나 음악, 인터뷰이를 다루는 카메라 앵글 등 표현 방식에도 고심한 흔적이 묻어 있다

A : 넷플릭스로 〈국가대표〉가 송출됐다면 그런 칭찬을 듣지 못했을 텐데, KBS1으로 방송되니 가능했던 평가가 아닐까(웃음). 특히 인터뷰는 정면으로 어떤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고 그 외의 장치들은 배제했다. 예컨대 배경을 없애거나 앵글을 단순화하는 것으로 집중도를 높였다.

Q : 〈개그우먼〉 또한 〈국가대표〉와 맥락이 맞닿는다. 사회 인식이나 시스템의 한계를 뚫고 나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까닭은

A : 방송국을 일터로 삼은 나 또한 시스템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방송국에도 여성 비율이 높아졌고 변화가 어느 정도 존재하지만, 사회 초년생 때는 여성 차별적이고 편견 어린 풍경을 방송국에서 여럿 마주했다. 그런 한계를 뚫고 앞으로 나아간 여성들이 멋있었고, 그 모습에서 얻는 통쾌함을 전하고 싶었다.

Q : 〈개그우먼〉, 올해 4월 방영된 〈윤여정〉 그리고 〈국가대표〉까지 세 편의 여성 다큐멘터리 아카이브 시리즈를 이어왔다. 여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담는 것의 의미는

A : 대한민국에서 서른다섯의 여성으로 사는 내가 관심 있는 이슈를 온종일 고민해 직접 결과물로 꺼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성취감을 준다. 가짜가 아닌 ‘진짜’의 마음으로 일한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앞서 여성들이 경험했던 길을 돌이켜보며 나 또한 용기 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Q : 실제로도 아카이브 시리즈는 작가, 촬영감독, 후반 작업자, 음악감독까지 여성 스태프로 꾸려졌다

A : 김선하 작가를 비롯해 〈추적 60분〉에서 디지털 성범죄나 권력에 의한 성폭행 문제를 다루면서 젠더 이슈를 콘텐츠로 담아낸 경험이 있는 분들과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됐다. 여성 고용 문제를 다룬 〈사표 쓰지 않는 여자들〉의 촬영감독, 후반감독님들과도 물론이다. 확실히 같은 고민을 품고 그림에 대한 동등한 수준의 책임감을 지닌 파트너와 소통하고 작업한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Q : 최근 〈노는 언니〉 〈골 때리는 그녀들〉 등 운동하는 여성을 다룬 예능 프로그램도 인기다. 미디어가 이들을 다루는 관행이나 기존 공식에서 변화를 느끼나

A : 시청자가 그간 여성을 다루는 관습이 불편하다고 목소리를 내면 창작자들도 반응을 의식하면서 변화를 거듭하게 된다. 오랜 시간 익숙하게 여겨졌던 기계화된 문법들이 존재하기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으면 답습할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이 이런 예능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여성상에 열광한다는 인식이 또 다른 시도와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Q :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A : 동료들과 ‘21세기의 방망이 깎는 노인 같다’는 자조적인 표현을 쓴다. 구석에서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장인 정신으로 갈고닦아 만드는 과정이 외롭기도 하지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자본의 압박이나 미디어의 빠른 호흡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사회적 가치를 고민하고 실현할 수 있어 기쁘다. 물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시장 흐름으로 시스템이 굴러가지만, 다큐멘터리는 그 누구도 만들라고 ‘푸시’하는 사람이 없다. 돈이 되지 않기에 기획부터 제작까지 왜 만들어야 하냐는 물음을 창작자 스스로 끊임없이 입증해야 한다.

Q : 앞으로 더욱 깊게 조명하고 싶은 이야기나 사회 이슈가 있을지

A : 거시적인 시스템보다 개인의 미시적인 선택에 관한 얘기를 선호한다. 과거에는 다큐멘터리라면 역사적 인물, 활동가들, 현대사의 맥락같이 거대 담론에 소명의식을 갖고 만들곤 했다. 요즘에는 확실히 피부로 와닿는 이야기, 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떻게 어려움을 뚫고 나갔는지에 관심이 가더라.

Q : 사회 발전을 향한 목소리를 꾸준히 담고 왜곡 없이 전하는 것은 꽤 고달프고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은

A : 불가능에 가깝지만, 괴롭지 않게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웃음). 이전까지는 창작자 스스로를 100% 갈아 넣어야만 좋은 다큐멘터리가 탄생한다고 생각했는데, 즐기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시청자의 반응은 늘 감사하지만 지나치게 얽매이면 정년퇴직까지 일할 수 없을 것 같더라(웃음). 항상 좋은 반응을 낼 순 없으니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지속할 수 있다.

Q : 다큐멘터리 PD라는 직업을 이어가는 데 경계하려는 태도는

A : 적어도 목소리를 내어준 사람들의 시간이 아깝지 않고,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의미가 희석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다큐멘터리 PD는 확실한 도덕적 기준을 갖출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여성주의적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행위는 기만적이다. 적어도 창작자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면서 뚜벅뚜벅 길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Q : 최근 다큐멘터리 신에서 느껴지는 두드러지는 변화는

A : 장르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강유가람, 이길보라 감독님을 필두로 젠더 담론이 자유롭게 오가고 아카이브 푸티지로 과거를 이야기하는 이태웅 선배의 <88/18> <모던코리아> 가 새 영역을 개척했다. 장르 확장성을 지니면서 시청자도 흥미를 느끼고, 취향의 선택지가 많아졌다.

</모던코리아>

Q : 본인 또한 스스로를 증명해 나가고 있는 여성 창작자다. 동시대 창작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을까

A : 윤여정 선생님의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 60세가 넘으니 즐길 수 있었다”는 말을 인용해 본다.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잘 살아남읍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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