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누명 서울대생의 명예 졸업

정희윤 2021. 10. 16. 09: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의학과 72학번 강종헌(70)ㆍ73학번 허경조(78), 영어영문학과 74학번 박영식(70), 사회계열 74학번 故 김승효(71)님의 형님ㆍ77학번 김정사(66)씨가 ‘서울대 명예 졸업장’을 들고 있는 사진. 본인ㆍ서울대 제공

대학교 졸업장을 40여년 만에 받은 사람들이 있다. 서울대학교가 지난 8월 학위수여식에서 재일동포 유학생이었던 의학과 72학번 강종헌(70)ㆍ73학번 허경조(78), 영어영문학과 74학번 박영식(70), 사회계열 74학번 故 김승효(71)ㆍ77학번 김정사(66)씨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면서다.

이들은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을 느끼고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왔지만,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이라는 누명을 쓰고 수감 생활을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지난 1972년부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정권 체제가 시작됐고, 이에 수많은 대학생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등을 주장하며 학생 운동을 벌이던 시기였다. 중앙일보는 화상ㆍ메일ㆍ전화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갖은 고문 당하며 허위 자백해 ‘북한 거물급 간첩’이 됐다”


공안 당국에 강제 연행되기 4개월 전 서울대 의대 건물 앞에 서있는 강종헌(70)씨. 강씨는 당시 만 24살의 평범한 의학도였다. 본인 ㆍ서울대 제공
약 50년 전 자신의 뿌리가 궁금해 19살에 한국으로 유학 왔다는 재일동포 2세 강종헌씨는 “적어도 대학은 ‘내 나라’에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넘어왔다”고 회상했다. 당시 가난해서 병원도 제대로 갈 수 없었던 한국 사람들을 보고 72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본과 2학년이었던 75년, 보안사령부 수사관들은 강씨를 갑자기 연행했다. 강씨가 ‘북한의 거물급 간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마음으로 국내 학생들을 사귄 것뿐인데 끝없는 고문에 수사 기관에서 요구하는 대로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짐승처럼 구타당하고 물고문, 전기 고문 등 받을 수 있는 고문은 다 받았다”며 “이러다가 죽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하루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들의 각본대로 말하고 진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76년 6월 강씨는 1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강씨는 당시 검사가 구형하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피고인 같은 간첩의 생존을 허용할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도 크고, ‘내 나라’에서 살아보겠다고 왔는데 나를 살려둘 수 없다고 하니 두려웠고 서글펐다”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강씨는 6년을 사형수로 살다 수많은 감형을 거쳐 13년 만에 가석방됐다. 강씨는 그 세월이 아깝지는 않다고 했다. 그는 “감옥살이 하루하루가 나름대로 의미 있었다”며 “감옥은 작은 대한민국이었고 그 안에서 내 나라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통해 사과받고 ‘무죄’ 확정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해 개정·공포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하 과거사정리법)'에 따라 1기 활동이 종료된 지 10년 만에 10일 부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뉴스1
이들을 감옥으로 끌고 간 주체나 연행 시기, 수감 기간은 각각 다르지만, 정권이 바뀌며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무죄 판결은 물론 국가의 사과를 받고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로 이들의 재심이 열리기까지는 3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김정사씨는 지난 2012년, 박영식씨는 2014년, 강종헌씨는 2015년 재심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박씨는 “재판장이 ‘과거의 재판이 잘못됐고 대신 사과드린다’며 진심 어린 사과도 해주고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고 말했다. 허경조씨는 75년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난 뒤 79년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사과를 받았다. 故김승효씨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강종헌씨에 따르면 김씨는 고문과 수감 생활로 인한 후유증으로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10년 ‘재일 한국인 양심수의 재심 무죄와 원상복귀를 위한 모임’을 만든 김정사씨는 지금도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재일교포 간첩 누명 피해자가 아직 100명 가까이 남아있어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대사관도 가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다”고 말했다. 많은 피해자가 고문의 트라우마 때문에 재심에 나서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김씨 역시 고문으로 인해 치료법이나 약도 없는 병을 얻어 다리를 잘 움직이지 못한다고 한다.


“인생 졸업 증서”,“사회적 무죄 선고”,“고맙고 또 고맙다”


이들은 모두 서울대의 명예 졸업증에 대한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강종헌씨는 “법적 무죄는 지난 2015년에 받았지만, 서울대의 명예 졸업장은 사회적 무죄 선고라고 받아들여진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영식씨는 “대학도 졸업 못 하고 인생이 끝나나 하는 아쉬움이 가슴 속에 조금 남아있었는데, 정말 고맙고 또 고맙다”며 “모교에 애정을 많이 느낀다”고 전했다.

허경조씨는 “‘인생졸업증서’를 받은 기분”이라며 “오래전 잊힌 존재를 모교가 상기해준 것이 기뻐 금고에 소중히 저장하고 있다”고 소감을 전했다. 허씨는 “지금까지의 억울함은 마음속 깊이 남아있고 죽을 때까지 계속 꿈속에서도 괴롭히겠지만, 명예 졸업장을 받고 나니 여생을 평온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이 기분이 언젠가 꼭 과거의 사건의 억울함도 녹여줄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희윤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