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디자인 잘하는 법? 읽고, 만져보고, 듣는다
“책을 만든 지 어느덧 50년이 돼간다”는 북디자이너 정병규(75)를 후배들은 선생으로 부른다.
“활자 중심의 출판이 주를 이룬 1970년대부터 영상과 이미지의 1990년대를 관통해 가상현실이 실제가 돼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출판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실험적인 개척자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사진기획자이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인 송수정이 쓴 이 글은 최근 출간된 ‘정병규 사진 책’(사진)에 실렸다. 정병규의 제자이자 사진책 전문 출판사 사월의눈을 운영하는 전가경 정재완이 만든 이 책은 책디자이너에게 바친 유례없는 오마주다. 정병규가 그동안 만든 사진책 31권을 조명하며 정병규 북디자인의 세계를 탐구한다.
지난 11일 서울 망원동 정병규디자인 사무실에서 책의 주인공을 만났다. 정병규는 “디자이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 직업이다. 늘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 마감하며 인생을 살아왔다”면서 “이 책이 강제적으로 날 돌아보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 실린 책들 대부분은 1980년대에 작업했다”며 “그 시대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80년대를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다. 산업화와 민주화 외에 문화혁명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80년대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혁명이 그때 일어났다. 가장 큰 것이 한글혁명이다.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었고 납활자가 사진식자로 바뀌었다. 한글전용이 시작되고 한글세대가 문화 생산의 주역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시기가 80년대였다. 글이 바뀌면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이 모든 것을 권력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힘, 대중의 힘으로 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는 “한국의 실질적 근대화가 그때 시작됐다”며 “그때 겨우 정지용과 김기림이 해금됐다. 마르크스가 해금됐고. 언론사와 출판사 등록 제한도 풀렸다”고 덧붙였다.
정병규는 80년대 초반 국내에 북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때 이 장르와 용어, 개념 등을 도입한 1세대 북디자이너다. 한글전용과 사진식자 도입, 해금 등으로 활짝 열린 출판문화 속에 디자인을 끌고 들어와 예술적인 책 만들기를 주도했다. 오랜 시간 정병규와 함께 책을 만들어온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그를 “책을 위해 태어난 사람, 책의 완성도를 향해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북디자이너라면 흔히 책의 표지를 만드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병규는 북디자인을 저자와 내용, 활자, 이미지, 책이라는 물건 등의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 맺기로 규정한다. 그는 이례적으로 사진책에 깊은 관심을 보였는데, 그가 만든 사진책은 북디자이너로서 역량이 집중된 작품이자 북디자인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보여준다.
그는 당시 사진가도, 출판사도 내켜 하지 않는 사진책을 만들기 위해 사진가를 부추기고 출판사를 설득했다. 그는 “여기 실린 사진책 중 90% 이상은 내가 만들자고 해서 만든 책”이라며 “사진책 하나하나가 내게 사건이었다”고 했다. 그는 사진가의 작품을 자기 마음대로 빼고 넣고 자르고 키우고 이어붙였다. 책 속에 놓인 사진들이 새로운 플롯과 이야기를 갖게 했다. 그렇게 만든 책을 사진집과 구분하기 위해 사진책이라 불렀다. 강운구의 ‘경주남산’, 김수남의 ‘한국의 굿’ 시리즈, 구본창의 ‘생각의 바다’, 소설가 조세희의 사진이 실린 ‘침묵의 뿌리’ 등 중요한 사진책들이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는 “사진집은 사진 작품이 살아가는 새로운 집”이라 생각했고, “사진책 디자인의 핵심은 사진가의 작품을 갖고 사진가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얘기했다. 사진책뿐만 아니라 책 전반에 통용되는 디자인론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3000종이 넘는 책을 만들며 북디자인 이론을 정립하고 강의를 통해 후배들을 가르쳤다. 북디자인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문자와 이미지를 연결하고 관계를 만들어주는 것”이고 “책의 본질을 살리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어 “디자인에 일반 원칙은 없다”면서 일을 하면서 그 책에 꼭 맞는 디자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자인을 잘하는 방법은 따로 없다. 책을 보고 읽고 만져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책이 말을 한다, 이렇게 해주십사하고. 그때까지 기다리고 듣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들어야 한다.”
정병규는 디자이너로서 책뿐만 아니라 신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진과 활자의 조합이라는 그의 관심사에서 볼 때 신문은 이 둘이 관계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신문디자인을 오랫동안 연구해왔고 중앙일보에서 아트디렉터로 3년간 근무하며 디자인 혁신 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신문은 콘텐츠에서 디지털에 지는 상황”이라며 “속도나 양, 복제에서 게임이 안 된다”고 진단했다. 이어 “그럼 뭐로 살아남아야 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뉴스페이퍼라는 콘셉트부터 바꿔야 되겠다”고 조언했다.
“‘매거페이퍼’로 가야 한다. 매거진+뉴스페이퍼. 뉴스에 목매달지 말고 플러스 X를 해서 개성을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는 매거진의 주제로 먹고 살아야 한다. 주제를 잡을 때는 어떤 세대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분야를 강조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검토가 있어야 한다.”
그는 또 “독자들과 대화하는 신문” “독자들의 걱정을 함께 해주는 신문” “뉴스의 ‘뉴’가 아니라 관점의 ‘뉴’를 보여주는 신문” “1면에 대한 모험을 하는 신문” 등을 방향으로 제시했다.
그는 스마트폰과 온라인으로 읽는 시대, 동영상이 지배적인 콘텐츠가 된 시대에 책과 신문의 미래를 쉼없이 모색해왔다. 활자매체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여전히 신뢰한다.
“노자의 말 중에 ‘원왈반’(遠曰反)이 있다. ‘멀리 간다는 것은 곧 돌아온다는 말이다’라는 뜻이다. 이대로 디지털 시대가 끝까지 갈 것인가. 나는 돌아올 것으로 본다. 지금은 디지털의 장점과 아날로그의 단점만 얘기한다. 디지털의 결손, 아날로그의 장점을 붙들고 고민할 필요가 있다.”
젊은 독자에 대해서도 “젊은이들은 온라인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아날로그의 진정성과 매력을 잘 모른다. 그런 것을 느낄 기회가 없었다”며 “활자매체가 이런 부분을 잘 살린다면 그들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젊은 시절 혼자 공부하며 더듬더듬 북디자인론을 정립한 것처럼 노년의 그는 벽에 ‘한글문자학’ 혹은 ‘한글인문학’이라 써놓고 초고를 잡아보는 중이다. 북디자이너로서 한글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겐 남다른 데가 있다. “한글이 가진 조형적 가능성과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려 한다”거나 “한글이 지닌 시각적 힘과 표현력에 어떤 가능성이 있으리라 믿는다”는 평이 그렇다.
“한글의 이미지성에 관심이 있다. 한글의 신체와 몸, 물질성에 관심이 있다. 그동안 한글의 언어학적 의미만 주로 다뤄졌다. 한글의 이미지성에 대한 논의가 결여돼 있다.”
“한글은 특별한 이미지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그는 한글의 상형문자적 가능성에 주목해왔다. 그중 하나가 “한글은 건축적”이라는 발견이다. 그는 “알파벳이 선형적이라면 동양의 한자나 한글은 건축적”이라며 “문자를 쌓아서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마스킹 테이프로 한글 글자를 쓰는 ‘테이포 타이프그라피’도 창안했다. 이를 통해 한글의 건축적 특성과 이미지 효과를 드러낸다.
칠십이 훌쩍 넘었지만 정병규는 여전히 골방 같은 사무실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책을 만든다. 최근엔 강운구 사진 전시회 도록을 만들었다. 그 도록을 펼쳐놓고 다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오후 6시 반에 시작된 인터뷰는 11시가 가까워서야 끝났다. 사진잡지 ‘보스토크’ 발행인인 김현호가 책에 쓴 ‘선생은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는 제목의 글이 딱 맞다. “그는 책의 세계를 떠돌며 많은 것을 보았다. 어쩌면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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