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23) 미국 사람들은 왜 차를 안 마실까..'영국이 수출한 차만 마셔라'..미국인 폭발

2021. 10. 1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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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스턴에 티파티 박물관(Boston Tea Party Ships & Museum)이 있다. 박물관은 옛날 화물선과 부속 건물들로 이뤄져 있는데 관람객은 이곳에서 300년 전 옷을 입은 박물관 직원 안내에 따라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퍼포먼스를 한다. 이 퍼포먼스는 1773년 12월 16일에 보스턴 시민들이 영국에서 출발한 배에 올라가 화물 상자를 도끼로 부수고 안에 들어 있던 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버린 사건을 재연한 것이다. 당시 바다에 던진 찻값을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6억원어치라고 한다. 이렇게 비싼 차를 왜 바다에 던져버렸을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미국에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1764년에는 당밀, 설탕, 와인에 세금을 부과하는 설탕세를 신설했고 1765년에는 인지세법도 실시했다. 인지세법은 신문, 팸플릿 등 출판물, 법적으로 효력을 갖는 모든 증명서, 허가증 등에 의무적으로 인지를 붙이게 하는 법이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 의회 안에 식민지 대표가 없으니 의회에서 독단적으로 식민지에 부과한 세금은 내지 않겠다고 맞섰다. 영국도 고충이 있었다. 식민지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부채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755년부터 1763년까지 북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이기기는 했지만 전쟁 비용을 충당하느라 세수 총액의 50%에 해당하는 1억3000만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부채를 지는 바람에 심각한 재정 악화가 초래됐다. 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세 등을 실시하려다 식민지 주민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모두 철회하고 차에 대한 세금만 남겨뒀다.

(위) 보스턴 티파티를 표현한 그림. (아래) 보스턴 시민들은 인디언 복장을 하고 영국에서 온 배에 올라가 차를 바다에 던졌다.
당시 미국 사람들은 차를 많이 소비했다. 미국에서 제일 먼저 차를 마신 이들은 네덜란드에서 온 이주민이었다. 그들은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렸던 오늘날의 뉴욕에 살며 고향에서 그랬던 것처럼 차를 즐겨 마셨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차를 마신 국가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아시아에서 차를 구입해서 유럽으로 돌아가 자기들도 마시고 유럽 여러 나라에도 공급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50년 동안 차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는 동안, 영국 동인도회사는 비단과 향신료 장사에 빠져서 차가 큰돈이 되는 사업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뉴암스테르담이 1674년 영국 관할이 된 후 그곳에 들어가 산 영국에서 온 이주민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처럼 차를 마셨다. 초기에 이들은 차를 어떻게 마시는지 몰라서 고생을 했다. 너무 오래 끓여 쓰디쓴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고 마시기도 했고, 차에 소금을 넣고 치즈와 함께 먹기도 했다. 간혹 주전자에서 차탕은 따라 버리고 삶은 찻잎만 먹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 뉴욕 시민들은 굉장한 차 애호가가 됐다. 여러 군데 티가든(오늘날의 카페 같은 장소)이 생겼고 차 우리기에 좋은 물을 얻기 위해 우물에 펌프를 설치해 1만4300갤런의 물을 퍼냈다. 이 물은 1갤런당 1페니의 비용을 받고 가정에 배달됐는데, 최초의 생수 배달 시스템이라 할 수 있겠다. 하도 성황이어서 1757년에 뉴욕 시정부가 ‘뉴욕시 찻물 관리 조례’를 발표했을 정도다. 1760~1765년 사이 부인들이 모임에 참가할 때는 찻잔, 찻잔 받침, 티스푼을 갖고 갈 정도로 차는 거대 트렌드가 됐다.

보스턴항구에 자리한 티파티 박물관. 현대의 동인도회사가 생산하고 있는 보스턴 티파티 차, 소종홍차가 들어 있다.
뉴욕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들이 소비하는 차는 모두 중국에서 온 것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배가 중국 광저우에서 차를 싣고 영국과 미국으로 가서 공급했다. 영국 정부는 영국 동인도회사에 차 무역에 관한 독점권을 줬다. 독점 상품이었기 때문에 동인도회사는 차 가격을 비싸게 매겼다. 영국 정부는 그들이 수입한 차에 세금을 많이 부과해 세수를 챙겼다. 동인도회사와 정부가 돈을 챙기는 동안, 소비자는 비싼 찻값을 내야 했다. 정말로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정식으로 수입된 차를 마시기가 힘들었다.

상품 가격이 비싸고 세금이 많이 부과되면 반드시 밀수꾼이 등장한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 광저우에서 차를 실어 올릴 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함께 차를 실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 차를 영국에 몰래 공급했다. 영국 시민들은 세금이 빠져서 가격이 싼 밀수 차를 죄책감 없이 구입했고, 밀수업자들은 큰돈을 챙겼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배는 아메리카 식민지에도 갔다. 미국의 차 사업가들은 이 차를 구입해 시중에 공급하고 막대한 부를 챙겼다. 시민들이 저렴한 밀수 차만 사고 영국 차를 구입하지 않자 영국 동인도회사 창고에 재고가 쌓이기 시작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악성 재고로 파산 위기에 처하자 영국 의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세금 때문에 식민지 차 산업을 네덜란드에 뺏겼다고 호소했다. 시민들이 세금이 많이 부과된 비싼 차를 사려 하지 않는다며 구제안을 요구했다. 이에 영국 정부가 동인도회사를 돕기 위해 홍차법을 내놨다. 홍차법의 요지는 런던에 쌓여 있는 동인도회사 재고 차를 면세로 미국까지 싣고 가서 파는 것이었다. 동시에 홍차법에 의해 영국에서 공급한 차만 미국에서 유통할 수 있다고 정했다.

▶과도한 세금과 규제에 미국인 독립 시도

차에 세금을 붙이지 않으니 네덜란드로부터 밀수한 차보다 가격이 싸졌다. 미국 주민들이 차 가격이 싸졌다고 좋아했을 것 같지만 그들은 오히려 격분했다. 부인들은 차를 대체할 음료를 개발했다. 진달래 잎으로 만든 차와 라즈베리 잎으로 만든 차가 등장했고 딸기 잎, 세이지, 사사프라스 나무껍질, 베리와 허브를 섞은 차가 등장했다.

차 가격이 밀수 차의 절반으로 떨어졌는데 대체 왜 불만을 갖고 대용 차를 마신 것일까? 사실 격분한 이들은 일반 소비자라기보다는 돈줄이 끊긴 밀수업자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과도한 간섭에 고개를 젓던 식민지 지식인과 손잡고 집단행동에 나섰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보스턴항에는 영국에서 온 배 세 척이 떠 있었고 그 배의 화물칸에 차가 잔뜩 실려 있었다. 누군가 “차를 바다와 만나게 하자!”고 소리쳤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디언 복장을 하고 손에 도끼를 든 사람들이 나타났다. 인디언 복장을 한 것은 자기들끼리 알아보기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스물 몇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아흔 몇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은 순식간에 화물선에 올라 세관원과 선원들에게 경고하고 화물칸에서 차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도끼로 상자를 쪼개고 차를 전부 바다에 버렸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보스턴 티파티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진행된 후 열렬한 차 애호가였던 미국 사람들은 더 이상 차를 마시지 않게 됐다. 그리고 보스턴 티파티 사건이 일어나고 두 해가 지난 1775년부터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한 가지 덧붙이면, 당시 미국 사람들이 불 지르고 바다에 던져버린 차는 중국 푸젠성에서 온 소종홍차와 녹차였다. 현재 영국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에서 ‘보스턴 티파티’라는 차는 소종홍차를 출시하고 있다. 이 회사는 과거 동인도회사와는 별개 회사다. 동인도회사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2010년에 새로 등록했다.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9호 (2021.10.13~2021.10.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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