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카유보트..걸작 그리고도 전시·판매 안 해 '잊힌 화가'
자고로 신화는 요절한 천재들이 차지하기 쉬운 법. 가난과 굶주림에 맞서 예술혼을 불태우다 간 고흐나 모딜리아니처럼 말이다. 이런 천재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혁신적인 작품을 창조하고도 신화는 고사하고, 유복함 때문에 당대 미술계에서는 물론 사후 오랜 세월 잊힌 화가가 여기 있다. 급변하는 19세기 파리의 도시상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화폭에 기록한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년)다.
재력가 집안 출신인 그는 경제적으로는 평생 고생할 일이 없었다. 원래 법률 공부를 했던 그가 화가가 되고자 결심한 것은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1870~1871년) 참전에서 돌아온 이후였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다소 뒤늦게 미술 공부를 시작한 셈이다. 그래도 워낙 어린 시절부터 틈틈이 다져온 실력이 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동년배들 사이에 입소문이 났다. 덕분에 르누아르, 모네 등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1874년)에 관련된 대다수 주요 화가들과 친한 친구가 됐다. 1876년에 개최된 두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공식적인 참여 작가로 초청받기에 이른다.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내외 빛의 묘사와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함에 있어서는 인상주의다운 면모가 단연 돋보인다.
사실 모델의 뒷모습이라는 구도는 독일 낭만주의 등에서 이미 선보였기 때문에 신선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예전 그림은 사람의 뒷모습 자체 또는 자연의 숭고함에 초점을 맞추거나 창밖을 아예 그리지 않음으로써 모델이 바라보는 전망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자 했다. 그에 반해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이 목도하고 있는 급격한 환경의 변화 묘사에 초점을 맞췄다. 근대 도시 형성을 목격하는 동시대의 대변자 격인 동생이 바라보는 전경을 통해 이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우선 눈여겨볼 점은 파노라마식의 사진 구도다. 일상의 한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바쁜 도시인의 모습과 도시 전경을 사진처럼 화폭에 담아내는 새로운 구성을 선보이고 있다. 오른쪽 맨 끝 남자는 뒷모습이 반만 보이도록 배치돼 있다. 마치 밖에서 화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 때문에 순간 포착의 느낌이 강화되는 한편, 역동성이 부여된다. 또한 그림 왼쪽 끝에 대화를 하며 걷고 있는 두 명의 남자도 이제 막 화면 밖에서 안으로 걸어 들어온 듯 보여, 이런 역동성이 한층 강조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지금까지 예를 든 세 작품만 봐도 카유보트가 스물이 넘어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술과 탁월한 표현력을 갖췄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그리고도 그다지 유명세를 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부유함과 너그러움에 있었다. 부모가 연이어 타계하면서 불과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그는 작품을 팔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판매는커녕 오히려 상업적으로 실패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료 화가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사들였다. 또한 모네와 피사로 등 몇몇 재능 있는 화가들을 선정해 생활비를 제공하는 등 그들의 작업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빚도 갚아주고, 작업실을 얻어주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인상주의 전시 기획·홍보를 위한 재정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인상주의 화가 이전에 진정한 후원가이자 컬렉터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다.
직감적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그는 일찌감치 유언장을 작성해 자신의 컬렉션 전체를 파리시에 기증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인상주의 작품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파리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고, 우여곡절 끝에 오르세 미술관에 안착했다. 파리시가 외면했던 그의 소장품은 세잔,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 전부 인상주의 대가들의 주옥같은 걸작으로, 오늘날 매우 귀한 작품들이다. 그런데 그는 이 기증 소장품 목록에 자신의 작품을 포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술관 전시에서 전혀 볼 수 없었고, 판매 의사가 없었으므로 거래되지 않았던 그의 작품들은 사후 친척들에게 상속됐다. 미술관 전시에서도, 시장에서도 자취를 감췄기에 자연스럽게 이름이 잊혀져버렸다.
하지만 반세기 넘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결국 그는 자신이 아낌없이 후원했던 동료 화가들과 나란히 미술관 벽에 걸리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작품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한 셈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9호 (2021.10.13~2021.10.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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