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개혁 시민운동가는 왜 오세훈 손을 잡았나
[신상호 기자]
▲ 김헌동 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부동산주거개혁운동본부장 |
ⓒ 이희훈 |
보수인 국민의힘에 적을 둔 서울시장과 부동산 개혁을 외치는 시민단체 활동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며 의아하다는 반응도 없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을 떠나 후분양제와 분양가상한제 등 부동산 개혁 방안을 두고 오랜 시간 공감대를 쌓아왔다.
특히 김 전 본부장의 내정 과정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강력한 요청과 의지가 작용했다. 오세훈 시장은 지난달 3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SH공사 사장 인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김헌동 본부장께서 평생을 시민운동에 종사하시면서 아파트값 거품빼기 운동에 전념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상황 속에서 김헌동 본부장님 같은 분을 모셔서 서울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잡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정책적 판단을 했고요."
오 시장은 김 전 본부장에 대해 "현재 치솟는 아파트값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높은 평가를 내린 것이다. 오 시장은 어떻게 김 전 본부장과 신뢰를 쌓게 됐을까.
2006년 시작된 오세훈과 김헌동의 인연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 2006년 5월 시작됐다. 당시 서울시장에 당선된 오 시장은 경실련에서 활동하던 김헌동 전 본부장을 처음 만난다. 그 자리에서 오 시장은 부동산 정책에 대해 조언을 구했고, 김 전 본부장은 아파트 후분양제와 분양원가 공개, 분양가상한제 실시 등을 제안했다.
오세훈 시장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6년 9월 은평뉴타운 등 서울시가 공급하는 모든 아파트에 대해 공정률 80% 이후 분양하는 후분양제 도입을 선언했다. 후분양 도입에 따라 은평뉴타운 1지구 등에선 당초 예상보다 10% 가량 낮은 가격에 분양이 이뤄질 수 있었다. 후분양제 덕분에 건설원가를 정밀 검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07년부터 서울시는 아파트 분양원가 60여 개 항목을 세세하게 공개하면서 소비자들이 검증 가능한 아파트 가격 제도를 구축했다. 판자로 지은 모델하우스만 보고, 건설업자들이 '부르는 대로' 분양가를 내야 했던 관행을 깬 것에 대해 시민단체들도 호평했다. 당시 불안정하던 서울 아파트 값도 차츰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오세훈 시장은 김 전 본부장의 정책 제안을 '집값 잡기 3종 세트'라며 극찬해왔다. 오 시장은 21대 총선 전인 지난 2019년 12월 김 전 본부장과의 유튜브 대담에서 "집값 그래프를 보면 (분양가상한제 등 시행 전인) 노무현 정부 시절 가파르게 오르다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안정됐다"면서 "분양가상한제, 분양원가 공개, 후분양제를 하느냐 마느냐가 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밝혔다.
오 시장은 "당시 분양원가 공개를 할 때도 말이 많았다"면서 "61가지 항목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것이었는데, 그때 결단해서 상세하게 공개하니까 시장에 상당한 파장을 미쳤다, 시작할 때 그렇게 파급효과가 있을지는 몰랐다"고 회고했다. 오 시장은 김 전 본부장을 만날 때마다 '본부장님'이라며 깍듯하게 존칭을 쓰고 있다.
▲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2019년 12월, 유튜브 <오세훈 TV>에서 당시 김헌동 경실련 본부장과 대담하고 있다. |
ⓒ 신상호 |
국민의힘이 분양가상한제 폐지와 분양원가공개 축소 등 '부동산 고삐풀기' 정책을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의 입장은 다르다. 당시 유튜브 대담 직후 기자가 분양원가 공개와 후분양제 등 부동산 개혁 정책에 대한 의지를 묻자, 오 시장은 "물론이다, 내가 했으니 내가 끝까지 책임진다"며 소신을 재확인했다.
김헌동 전 본부장도 오세훈 시장의 추진력을 호평해왔다. 김 전 본부장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후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2006년 후분양제·분양원가공개 등을 제안했고, 사실 (오 시장이) 못할 줄 알았는데 약속을 지켰다"며 "오세훈은 그렇게 해서 집값을 잡았던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보면 오 시장의 SH 사장 도전 제안을 김 전 본부장이 수락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부동산 정책에 있어서 두 사람은 '말이 통하는 사이'다. 그리고 김 전 본부장은 경실련 시절에도 부동산 개혁 의지가 있는 정치인이라면 정당을 가리지 않고 조언을 해왔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나선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경실련이 정책 협약을 맺기까지 중심 역할을 했고,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정동영 전 의원 등 당을 가리지 않고 정치인들을 만나왔다.
김 전 본부장은 이번에 SH공사 사장 공모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동안 주장해 왔던 부동산 개혁 정책을 실제 적용해 보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시민단체 활동가에서 공기업 사장으로 변신하려는 그의 선택을 두고 일각에선 비판이 있지만, 단순히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으로 폄훼하기는 어렵다.
토지임대부와 후분양제 정상화... 재시동 걸까
그렇다면 김헌동 전 본부장이 SH공사 사장이 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기업 사장은 정책이나 법률을 만드는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SH공사 사장에겐 강력한 권한이 있다. 서울 시내 모든 공공 아파트를 공급하는 권한이다. 아파트 분양가와 공급 방식과 시기에 대해서는 엄연히 사장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김 본부장에게는 이미 확고한 구상이 있다. 토지는 공공이 임대하고, 건물만 분양하는 토지임대부 주택, 이른바 '반값 아파트'의 전면 도입이다. 땅값을 제외하고 건물만 분양한다면 지금도 강남에 2억~3억원대 아파트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실제로 정부가 고시하는 기본형 건축비(평당 750만원)을 적용할 경우, 토지임대부 30평 아파트 분양가는 2억원대면 충분하다.
실제 지난 2011~2012년 LH가 서울 강남에 공급한 토지임대부 주택인 LH서초5단지와 LH강남브리즈힐은 전용 84㎡형 분양가가 2억~2억2000만원에 불과했다. 김 전 본부장은 저렴한 아파트가 공급되면 서울 아파트도 가격 상승 기대감이 줄면서 가격이 잡힐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당시 강남에서 2억 아파트가 나오면서, 왕십리 등 분양가가 상대적으로 비쌌던 지역에서 대규모 미분양이 났다"며 토지임대부 효과를 높게 평가해왔다.
물론 강남 토지임대부 주택이 민간 시장에 거래되면서 가격이 앙등하는 부작용을 막기 위한 보완책은 김 전 본부장이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현재 SH공사가 공정률 60%에서 후분양을 실시하는 것도 공정률 80%로 다시 바꿀 수 있다. SH공사 내규도 공정률 80%로 규정하고 있고, 공정률 80%일 때, 공사 원가 검증도 보다 정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경실련에서 줄곧 주장해왔던 SH공사의 아파트 공사(기성)원가 공개도 사장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김 전 본부장은 지난 9월 <오마이뉴스>와 만난 자리에서 "후분양을 80% 공정에서 하고 미리 사전 예약을 받아 건물만 분양하는 방식을 서울시에서 하면, 정부나 대선주자 사이에서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본부장은 자신의 임명에 대해 반대 기류가 강한 시의회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다. 그가 시민단체 시절 주장해 왔던 부동산 시장 개혁 방안들을 현실에 적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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