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해공 신익희선생 비문

김삼웅 2021. 10. 1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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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3월 공은 건국의 위대한 공로로 중장에 추서되었다

[김삼웅 기자]

 해공 신익희(1894~1954)
ⓒ (사)해공신익회선생기념사업회
 
공은 이에 중국 각처를 편답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동지를 규합하여 항전을 도왔는데 무릇 황하를 7차나 건너고, 양자강을 5차나 섭렵하는가 하면, 운남성ㆍ귀주성 등 여러 곳을 떠돌며 의혈로 마음이 끓어 오르는 가운데 수족이 으스러질 지경으로 몰두하는 나날이었다. 일본군은 그 세력이 점차 팽창하여 남경마져 함락하려 할 때 우리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가 지구전을 펼 태세였다.
39년 2차 세계대전이 계속 발발하여 일제는 독일ㆍ이태리 등과 서로 결맹하여 정세는 악화되고 창궐할 즈음 미국ㆍ영국ㆍ불란서ㆍ소련ㆍ중국 등 여러 나라 정의의 장수들과는 함께 겨룰 수 없는 전세여서 마침내 45년 8월 일본 군국주의 무리는 항복하기에 이르렀으며, 우리나라는 백일하에 광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1951. 6. 25. 부산, 정부 3부 요인들이 6.25 1주년 기념식장에서 한국전쟁 전몰장병에게 묵념을 드리고 있다(단상 앞 열에는 왼쪽부터 신익희 국회의장, 이승만 대통령, 김병로 대법원장, 장면 국무총리 등이 서 있다).
ⓒ NARA
 
 8월 15일 그러나 미ㆍ소 양군이 우리 강역에 한결같이 진주하여 남북으로 분단하고 각기 군정을 실시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군의 도움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공도 환국하였는데 그 뒤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공작대 등 반공단체를 조직하며 완전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남김없이 힘을 쏟았다. 미ㆍ소 양국 회의가 열려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을 획책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48년 유엔의 결의로 남한의 총선거부터 먼저 실시하게 되자 공은 고향인 경기도 광주군에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 국회가 개원된 후 공은 의장에 선출되어 새정부 수립에 헌신, 제헌국회의 기틀을 다졌고, 그 후 두 차례 국회의원에 거듭 당선되어 세 차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50년 6ㆍ25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정부가 부산에 3년간 내려가 있다가 전란이 평정됨에 환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은 전제정치를 멋대로 자행하여 아부세력이 횡행하기 이를 데 없어 공은 의장 재임 6년 동안 이를 바로잡는 데 심혈을 다해야 했다. 
 
 1956년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의 민주당 신익희후보 한강 유세
ⓒ 서울스토리
 
50년 5월 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됨에 민주당은 공을 대통령 후보를 추대하고, 5월 3일 한강백사장에서 유세를 개최하였다. 생업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유세장에 몰려든 시민들이 3, 4십만 넘었는데 이 때 63세인 공은 과로가 극심한 상태였다. 이어 호남지방선거 유세차 5일 이리에 이르렀을 때 홀연 열차 내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공의 급서 비보에 나라 전체가 놀라 통곡을 금치 못했으며, 영구차가 서울에 돌아올 때 장안이 기울만큼 시민들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서울역에서 효자동 자택에 이를 때 흐느끼는 인파 대열로 영구차가 움직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거족적인 국민장을 거행하고, 서울 근교 우이동 산기슭  경좌에 안장했는데 회장자는 무려 1백만이나 되었다. 

공이 서거한 뒤 60년 4월 학생의거가 일어나 독재정권은 비록 축출했지만, 정국은 안정되지 못하던 중 이듬해 5월 군사정변이 다시 일어나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는 결코 편안한 날이 없었다. 국민들이 공을 그리워하며 우려를 금치 못했다. 

62년 3월 공은 건국의 위대한 공로로 중장에 추서되었다.

평산 신씨는 고려 태사 장절공 휘 숭겸으로부터 현관대작 벼슬이 이어져 내려오기를 1천 년 동안 국내 명문 거족이 되었다. 11세조 충장공 신립 장군과 그 계씨 신 할 모두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순절하였으며, 고조 신대우 또한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하여 세칭 원구 선생으로 알려졌는데 음직 벼슬이 아경에 이르렀다. 증조 효헌공 신 현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중추에 오르고, 그 중씨 신 작과 함께 가학을 계승하여 성명을 누렸다. 조부 신명호는 현감을 지냈는데 덕치로 칭송이 자자했다.
 
 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 유영호
 

선고는 신 단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청화를 밝히다가 서울 동녘 깊은 골짜기에 홍천취벽이라 하고 은거하였는데 사실은 서울의 명승지였다. 중년 이후 세상 일이 점점 그릇되어 감을 보고 경기도 광주 본향에 돌아와 살면서 만년에 장례원경을 지냈다. 사람들마다 맑고 조촐한 인품이라 해서 근세 사대부 집으로 알려졌으며, 문학과 청덕으로 명문을 이루었다. 

공의 집안은 윗대로부터 이름을 떨치며 공으로 하여금 충의의 천성을 낳게 했고, 또한 가정 생활을 통하여 이를 본받게 했다.

영식 신하균은 공을 계승하여 국회의원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1백 년 이래 격변이 우심할수록 명문 세가로서 그 이름이 떨어지기 다한 데가 얼마나 많으랴만, 공의 집안만은 의연하다. 이에 감동이 없지 않다. 
 
 해공 신익희 선생 어록 새겨진 비석
ⓒ 박정훈
 
일전에 하균이 나를 찾아와 묘표를 청함에 나로서는 가까이 알고 지내오며 정으로써 지낼 뿐 글로써는 되지 아니한 줄로 아나 이렇게 쓰기에 이르렀다.

애석하다. 인생은 소지를 펼치기 어려우며, 사람들과 아울러 단 하루인들 편안하게 살기 또한 어렵다. 이 육신 모습 거둔 뒤 다시금 아름다운 글을 얻기 어려울 바에는 한평생 노작으로 짓기를 다하리라 했다. 나라를 위하여 물불  아끼지 않고, 이나마 후세에 전하고자 나와 같이 글에 소양이 없으면서도 이 글을 초함은 감격스런 뿐이며, 또 부끄러울 뿐이다.

1962년 동래 정인서 짓고, 아들 신하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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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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