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디벨로퍼..신영·MDM·피데스 등 토종 두각

정다운, 반진욱 2021. 10. 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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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 풀어 도시·공간 혁신 역할 UP

국내 부동산 디벨로퍼 역사는 길지 않다. 초기 디벨로퍼는 1990년대를 중심으로 개발된 토지에 주로 주택, 상가, 오피스텔 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디벨로퍼들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다.

외환위기 이후 건설 업황이 어려워지자 대규모 개발 사업을 주도하던 건설사들은 어떻게든 미분양 위험을 줄여야 했다. 아예 개발 사업을 포기, 축소하거나 보유 토지를 팔면서 단순 도급 사업에 치중했다. 사업 시행자로서의 건설사 역할이 축소되면서 이들이 담당하던 기획과 개발, 인허가 업무를 대행해주는 시행사, 한국형 디벨로퍼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행은 디벨로퍼가, 시공은 건설사가 맡는 식으로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디벨로퍼의 성장

▷외환위기 후 시행 맡으며 덩치 키워

2000년대 초반 부동산 경기 호황 시절 디벨로퍼들은 공격적인 사업을 추진하면서 몸집을 키워왔다. 이 중 꾸준히 실력을 검증받은 정춘보 신영 회장, 문주현 MDM 회장, 피데스개발의 김건희 회장·김승배 대표가 1세대 디벨로퍼로 손꼽힌다.

1984년 소규모 빌라 공급 업체로 시작해 현재 자산운용사를 비롯한 여러 개 자회사를 거느린 신영은 설립 30여년 만에 연매출 1조원을 달성한 국내 ‘1호 디벨로퍼’다. 지난해 매출액 1억1495억원, 영업이익 1128억원을 기록했다.

1997년 경기 성남시 분당 구미동 땅을 사들여 주거용 오피스텔을 분양한 것이 정춘보 회장의 첫 작품이다. 정 회장은 이후 분당신도시 정자동 주상복합 ‘로얄팰리스’, 수내동 오피스텔 ‘로얄팰리스하우스빌’, 서울 공덕동 ‘마포신영지웰’, 충북 청주 ‘지웰시티’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차례로 성공시켰다. 손대는 사업지마다 성공 가도를 달리자 정 회장에게는 ‘한국의 트럼프’라는 별명도 따라붙었다. 신영은 2017년 대규모 프로젝트인 ‘브라이튼여의도’ 개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브라이튼여의도는 옛 MBC 부지에 들어서는 고급 주거·상업 단지다. 1만7700㎡ 부지에 1조2000억원을 들여, 2023년 6월까지 아파트 454가구와 오피스텔 849실, 오피스 1개동을 짓는 프로젝트다.

MDM은 문주현 회장이 1998년 설립한 업체로 주택 건설업과 부동산 개발업, 분양 대행업, 부동산 임대업 등을 주로 해왔다. 문 회장은 MDM을 설립한 뒤 분당 트리폴리스와 서초동 현대슈퍼빌, 목동 현대하이페리온, 분당 파크뷰 등 개발 사업을 연이어 성공시키면서 회사를 키웠다. 탄탄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M&A(인수합병)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하면서 부동산 개발과 금융까지 아우르게 됐다. MDM그룹은 부동산 개발 회사인 엠디엠, 엠디엠플러스 등을 비롯해 금융 계열사인 한국자산신탁과 한국자산캐피탈, 한국자산에셋운용 등을 거느리는 말 그대로 부동산종합그룹으로 성장했다.

김건희 회장과 함께 피데스개발을 설립한 김승배 대표 역시 부동산 개발 경험이 풍부한 1세대 디벨로퍼다. 1980년 대우건설에 입사해 무려 70여개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2004년 피데스개발을 설립, 아파트 사업을 중심으로 골프텔·주상복합단지·아파텔 등 다양한 상품군을 개발해 성공시켰다.

김승배 대표는 도시재생, 역세권 개발 사업에도 공을 들였다. 노후 백화점을 새로운 주거복합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경기 ‘안양 힐스테이트 범계역 모비우스’가 최근 준공했고 지하철 1호선 방학역 인근 통신기지국 부지는 복합쇼핑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올해 말 입주 예정인 ‘힐스테이트 삼송역’은 물론 주상복합 ‘기흥역 파크푸르지오(2018년)’, 오피스텔 ‘힐스테이트 판교 모비우스(2018년)’도 피데스개발 작품이다.

앞서 등장한 디벨로퍼들이 1세대라면 2010년도 들어서부터는 HMG, 네오밸류, 안강개발 등 ‘젊은 피’ 중심의 신진 디벨로퍼들도 두각을 나타냈다.

대우증권(현 미래에셋증권) 출신 손지호 대표가 이끄는 네오밸류는 개발 업계 최초로 택지개발지구에서 원주민이 보상으로 받은 땅을 모으는, 일명 ‘대토개발’ 방식으로 주상복합 아파트를 개발했다. 2012년 6월 첫 개발 사업인 강남구 세곡지구 ‘세곡푸르지오시티(400실)’를 성공적으로 분양했고 이어 ‘위례신도시아이파크1·2차’, 구리시 ‘구리갈매지구아이파크’ 수원시 ‘광교아이파크’에서 대규모 주상복합 단지를 쏟아내며 어느새 조 단위 매출을 이뤄냈다.

네오밸류는 라이프스타일 중심의 디벨로퍼를 표방한다. 네오밸류 자체 브랜드 쇼핑몰인 ‘앨리웨이’를 통해 복합문화 공간을 직접 개발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단순한 주택 분양에서 나아가 상가시설을 직접 소유하면서 운영해 화제를 모았다. 수원 광교신도시 광교아이파크 상가시설 ‘앨리웨이광교’가 대표적이다.

안강개발의 안재홍 대표도 디벨로퍼 업계에서는 젊은 피에 속한다. 부동산 분양 전단지를 돌리던 영업사원에서 8년여 만에 시행사와 시공사를 거느린 디벨로퍼로 변신했다. 상가 분양 마케팅 업체를 설립해 오피스텔 같은 임대 투자 상품을 팔다 30대 들어 오피스텔 직접 개발에 눈을 돌렸다. 한동안 업계 관심 밖이었던 서울 마곡지구 사업 초기에 뛰어들어 대박을 터트렸고 경기 남양주 다산, 김포 등지로 영역을 확장했다. 시행사로 자리매김을 한 뒤 건설사까지 인수해 사명을 안강건설로 바꿨다.

부동산 개발 주체로서 국내 디벨로퍼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주요 지역 아파트 분양, 신도시 개발 등의 핵심 중추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매경DB>
▶미국·일본 ‘디벨로퍼’ 선진국

▷중국 ‘헝다’ 등 실패 사례도

다만 아직 국내에서는 디벨로퍼 역할이 해외에서만큼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인기 주택 브랜드를 단 시공사 중심으로 부동산 개발이 이뤄지는 우리나라와 달리 해외에서는 디벨로퍼가 부동산 개발 핵심 역할을 맡는다. 디벨로퍼가 ‘갑’으로서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 ‘을’인 시공사가 합류해 공사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동산 산업이 발달한 미국, 일본의 경우 거물 디벨로퍼 하나가 부동산 개발을 마치고 나면 단숨에 도시 풍광을 바꿔놓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뉴욕 중심가 마천루 개발을 주도해 유명세를 탄 뒤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도널드 트럼프, 도쿄 유명 관광지 롯폰기힐스 건물을 올린 모리빌딩 등이 대표적이다.

자본이 많고 토지도 넓은 미국은 디벨로퍼가 사실상 부동산 개발의 전 과정을 담당한다. 우리나라와 달리 디벨로퍼 회사가 건설사, 관리 회사를 자회사로 두는 경우가 많다. 시공·분양·임대까지 디벨로퍼가 책임진다. 미국에서 단독주택 위주로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대형 디벨로퍼 ‘디알호튼’은 토지 매입부터 개발·시공·분양·임대를 모두 담당한다. 일종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셈이다. 상업용 부동산 디벨로퍼인 ‘트라멜 크로우’는 시공, 분양에서 나아가 부동산 운영, 자산관리 서비스까지 제공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해 부동산 보유·투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적고, 부동산 규제 수준이 높지 않다. 디벨로퍼들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낮은 규제 문턱을 이용, 도쿄·오사카 등 핵심 지역의 우량 자산을 선점, 높은 임대수익을 벌어들인다.

일본 최대 규모 부동산 디벨로퍼 미쓰이부동산은 주로 도심 역세권의 오피스·상가·아파트 등을 개발·운영한다. 핵심 상권을 개발, 임대 운영하면서 고수익을 올린다. 이 중 도쿄 도심 주요 5구에 위치한 건물 임대수익이 전체 수익의 81%를 차지한다. 막대한 임대수익은 곧 월등한 영업이익률로 이어진다. 국내 건설사들 평균 영업이익률이 7% 수준인 것에 비해 미쓰이부동산 영업이익률은 14%에 달한다.

다만, 해외 디벨로퍼들이 모두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규모는 크지만 속은 부실한 ‘속 빈 강정’ 같은 기업도 많다. 최근 파산 위기에 놓인 중국 헝다그룹은 디벨로퍼 실패 사례에 속한다. 헝다그룹은 2020년 기준 중국 건설사 중 자산 규모 1위를 기록한 대형 디벨로퍼다. 급성장하는 중국 부동산 시장에서 문어발식 확장을 하며 사세를 불려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지난해 부동산 개발 업체 대출 규제안을 시행하면서 위기에 빠졌다. 자금 수혈이 어려워지면서 재무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됐다. 올 9월 기준 부채 추산 규모만 360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디벨로퍼였다(위). 일본에서는 도쿄 도심권의 건물을 선점해 고수익을 올리는 디벨로퍼가 많다. 사진은 모리빌딩이 개발을 주도한 도쿄 도라노몬힐스 일대. <로이터 연합, 모리빌딩 제공>
▶디벨로퍼 산업 선진화되려면

▷규제 철폐·부정적 인식 극복해야

전문가들은 국내 디벨로퍼 산업이 선진국 수준으로 성장하려면 정부·업계 모두 전방위적 노력을 펼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선 정부가 부동산 산업 규제부터 철폐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현재 국내 법규로는 건물 설계·시공 겸업이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디벨로퍼가 설계, 시행 외에 시공·유지관리·임대업 등 다양한 개발 역량을 쌓기 힘들다. 이는 곧 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해외 디벨로퍼들은 시행만 맡지 않는다. 사업 발굴, 기획, 설계, 자금 조달, 분양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통합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디벨로퍼가 시행 외에는 다른 일을 하기 어렵다. 수익을 얻고 역량을 쌓을 기회가 해외 업체에 비하면 현저히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정부가 개발 사업 인허가 과정을 보다 합리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동산 인허가 과정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국내 디벨로퍼 대부분이 인허가를 얻는 데 적잖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영세한 업체들이 많은 게 국내 디벨로퍼 산업의 현실이다. 회사 자체 역량이 부족한데, 이마저도 사업 인허가를 얻는 데 허비한다. 업체들이 현장 경험·자본 확보 등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사업 인허가 과정을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디벨로퍼 업계 스스로의 노력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높다. 사회 전반에 깔린 디벨로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개선에 나서고, 사업 다각화로 수익 극대화를 노려야 한다는 의견이다.

실제 국내 디벨로퍼는 주택 개발로 과도한 수익을 벌어들이는 ‘일확천금’ 이미지가 강하다. 각종 부동산 개발 비리에 연루되면서 물의를 일으키는 사례도 많았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디벨로퍼가 ‘한탕주의’만 노리는 곳이 아니라는 대중 인식 개선이 필수다. 주택에만 치중된 개발 사업 구조를 다양화해 공간 혁신을 창출하는 기업으로서 대중의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업 다각화와 M&A로 디벨로퍼 자체 역량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해외 디벨로퍼들은 산업·사회 구조 변화에 맞춰 사업을 다각화하거나 M&A로 사업 범위를 넓힌다. 미국 디벨로퍼 디알호튼은 상품 포트폴리오 다각화로 수익을 극대화한 사례다. 디알호튼은 생애 주기별로 차별화된 주택 상품을 운영한다. 생애 첫 주택 보유자를 겨냥한 저가 상품 ‘익스프레스’, 고급 주택 브랜드 ‘에메랄드’, 유지·보수비를 낮춰 노인 생계 부담을 줄여주는 ‘프리덤’ 등 다양한 주택 라인업을 앞세운다. 또한 지속적인 M&A로 통해 미국 26개주, 78개 자회사를 거느린 거대 디벨로퍼로 급성장했다.

“최근 10년간 매년 평균 340개의 부동산 개발 업체가 국토교통부에 등록됐다. 기업은 우후죽순으로 느는데 국내 부동산 산업 규모는 한정돼 있다. 경쟁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면 전략적 M&A와 사업 다각화를 통해 역량을 키워야 한다. 미국 전역에서 활동하는 디벨로퍼로 성장한 디알호튼, 해외 진출에 성공한 일본 다이와하우스 등의 사례를 참고할 만하다.” 임근구 삼정KPMG 건설·인프라사업본부장 설명은 눈길을 끈다.

[정다운 기자, 반진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29호 (2021.10.13~2021.10.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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