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 종전선언·평화협정 퍼포먼스 아닌 군사력‧동맹‧정보력으로 지켜야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채인택 2021. 10. 13.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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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불가침 협정으론 평화 못 지켜
일촉즉발 대만해협에서 교훈 얻어야
평화협정 앞서 종전선언 노리지만
군사력·동맹·정보력부터 갖춰야
북핵과 남침의사 포기 방안이 우선

대만 공군사령부가 10월 2일 대만 공군기가 중국군 항공기를 감시 비행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공개했다. '입장이나 주장 등이 확고부동해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뜻의 견정불이(堅定不移)라는 사자숙어가 보인다.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사진=대만 공군사령부 페이스북 캡처]

10월의 대만해협에서 격랑이 일고 있다. 지난 1~4일 149대의 중국 공군기들이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 안방 드나들 듯하며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쟁급 항공 무력시위를 벌였다. 2~3일엔 중국에서 멀지 않은 필리핀 해와 오키나와 남서부 해역에서 미국·영국·일본·네덜란드·캐나다·뉴질랜드 등 6개국 해군이 ‘자유로운 인도·태평양 실현’을 이유로 합동훈련을 했다. 말 그대로 '무기의 그늘'이다.

미군 인도태평양 사령부에서 제공한 훈련 사진. 2~3일 중국에서 멀지 않은 필리핀해와 오키나와 남서부 해역에서 미국·영국·일본·네덜란드·캐나다·뉴질랜드 등 6개국 해군이 ‘자유로운 인도·태평양 실현’을 이유로 합동훈련을 하는 장면이다. 미국이 2척, 영국의 1척의 항공모함을 동원했으며 일본 해상자위대에서도 헬기 항모가 참가했다. 앞줄 왼쪽부터 영국 항모 퀸엘리자베스함, 일본의 휴가급 헬기 항모인 이세함, 그리고 미 해군의 로널드 레이건함과 칼 빈슨함. AP=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 막바지인데도 정전협정 체결에 주력하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에 이어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을 찾아 종전협정 논의에 들어간다.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신해혁명 110주년을 하루 앞둔 9일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연설한 뒤 참석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있다. AP=연합뉴스

남북 합의와 미‧중 설득 태산준령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정전협정은 고차원 방정식이다. 북한의 동조와 미국의 협력, 중국의 호의가 필수적이다. 여기에 더해 미국‧인도‧호주와 함께 쿼드(인도‧태평양 전략대화)를 이루고 있는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도 일정 부분 교감이 필요하다.
대만의 차이잉원(蔡英文) 총통이 쌍십절인 10일 타이베이에서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건국 110주년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미국은 79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대만과 관계를 단절하면서 대만 관계법을 제정해 대만과 특수 관계를 유지해왔다. 이 법은 미‧중 국교 수립 이전 양자가 맺었던 외교협정을 유지하고, 대만 방어용으로 미국산 무기를 제공하며, 대만 주민의 안전과 사회경제적 제도를 위협하는 무력사용 등 강제적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력을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82년엔 미국이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에 기한을 정하지 않고, 무기수출 시 중국과 사전협상하지 않으며, 양안 중재 역할을 맡지 않고, 대만 관계법을 수정하지 않으며, 대만 주권에 대해 일관된 입장을 변경하지 않고 대만에 중국과의 협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6개 보장을 발표했다. 대만 관계법과 6개 보장은 미국과 대만 관계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6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양제츠(楊潔篪)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회담하고 있다. 두 사람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연내 화상 정상회담에 합의했지만 시기와 의제는 정하지 않았다. 설리반 보좌관은 이튿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나ㅣ토 사령부를 찾았다.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중시 외교다. 신화=연합뉴스.

미·중 대결 시기에 동시 협력 난제


시기적으로도 대만‧홍콩‧신장위구르‧남중국해‧인권 등을 둘러싸고 미‧중 대결이 한창인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도마 위에 오른 의제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우는 미국 외교에서도 기본 가치에 해당하고, 중국에서도 이른바 체제와 정권의 사활이 걸린 핵심 이익 사안이다. 미국의 가치 중시 외교와 중국의 핵심이익 결사옹위 외교가 부딪히는 형국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지난 9월 21일 제76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화상으로 연설했다. [AP·신화=연합뉴스]
지난 6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양제츠(楊潔篪) 중국공산당 중앙외사공작위원회 판공실 주임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연내 화상 정상회담에 합의했지만 시기와 의제가 여전히 안개 속에 싸인 이유다.

군주제 타도 신해혁명 기념일 양안설전


신해혁명의 불길을 댕긴 후베이성 우한의 하오바이녠 호텔 앞에 놓인 석상 우한 = 장세정 특파원
양안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첫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건국한 10월 10일 쌍십절을 맞아 격렬하게 설전을 벌였다. 10월 10일이 10이 연속으로 나와 쌍십절로 불린다.
시 주석은 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신해혁명 110주년 기념식에서 “완전한 조국 통일의 역사 임무는 반드시 실현해야 하며 틀림없이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대만 문제는 완전히 중국 내정으로 어떤 외부의 간섭도 용납할 수 없다”며 대만 문제로 중국을 전방위로 압박해온 미국과 유럽 등 서방으로 화살을 돌렸다.
2000여 년 이어진 중국의 황제지배를 끝낸 신해혁명이 시작된 우한의 우창기의 기념관. 이곳 호북군정부에서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이 시작됐다. 신경진 베이징 특파원
그러자 다음날인 10일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중화민국(현 대만) 110주년 건국기념일(쌍십절) 행사에서 “대만인이 압력에 굴할 것이라는 환상은 절대 없어야 한다”며 “주권 확보와 국토 수호를 견지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실 쌍십절은 중국 본토에서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자리를 옮긴 중화민국(대만의 공식 국호) 입장에서도 통한의 날이다.
1946년 충칭에서 쌍십협정을 위한 회담을 하던 당시의 장제스(왼쪽)와 마오쩌둥. 사진=퍼블릭 도메인


쌍십협정 맺고도 공산당, 전쟁 준비


45년 이날은 항일전에서 승리한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1887~1975) 총통이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충칭(重慶)에서 만나 씽십회담기요(雙十會談紀要‧쌍십협정)에 합의한 날이다. 이 협정으로 양측은 평화‧연대와 민주주의 수립, 국민 자유 보장 등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지만, 통일국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영할지는 거론하지 못했다.
국공 담판을 성사시키기 위해 장 총통은 일본의 항복 하루 전인 8월 14일 소련과 중‧소 우호조약 맺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중재를 기대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에 전문을 보냈고, 8월 29일 마오가 충칭으로 와서 회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본심을 감추고 등 뒤에 비수를 숨겼다.
1946년 충칭에서 쌍십협정을 위한 회담을 하던 도중 항일전 승리 기념 연회에서 만나 건배하는 마오쩌둥(왼쪽)과 장제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시카와 요시히로(石川禎浩) 일본 교토대 교수의 『중국근현대사3-혁명과 내셔널리즘』(삼천리)에 따르면 40일이 넘는 회담 기간에도 중국공산당은 착착 전쟁을 준비했다. 공산당은 그동안 소련 점령지인 동북지역에 병력 11만 명과 당 간부 2만 명을 보내 평화가 아닌 무력 통일을 추구했다. 국민정부는 뒤늦게 만주에 병력을 투입했지만 늦었다.
국공내전 말기인 1949년 1월 베이징에 저항 없이 입성하고 있는 중국 공산군. 사진=퍼블릭 도메인


공산당 포위로 창춘서만 16만 아사


중국공산당은 국공 내전에서 무자비한 포위 작전을 구사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홍콩대 인문학 석좌교수인 프랑크 디쾨터는 『인민 3부작‧1 해방의 비극/중국혁명의 역사 1945~1957』에서 중국공산당의 린뱌오(林彪‧1907~71)가 동북지역을 장악해가던 48년 5월 30일 “창춘(長春)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약 50만의 민간인과 10만의 국민당 군대는 150일간의 포위 공격으로 16만 명이 굶거나 병으로 숨진 다음에 항복했다. 공산군은 48년 11월까지 동북지역을 장악한 다음 49년 1월 22일엔 베이징(北京)에 무혈입성했다. 그해 4~5월에는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를 포위 공격 끝에 점령했다.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장제스는 근거지 충칭마저 무너지자 12월 10일 대만으로 떠났다.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가운데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저우언라이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국공내전으로 600만~700만 희생


이 국공내전에서 군인 175만을 포함해 600만~700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디쾨터 교수는 “마오쩌둥의 집권 초 10년은 최소 500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 20세기 최악의 폭정이 하나”라고 지적했다. 토지개혁에 이어 반혁명 진압 운동이라는 이름의 대공포 시대가 이어졌으며, 정부 고위관료와 민간 지식인을 정화할 목적으로 삼반‧오반 운동이 이어졌다.
폴란드를 침공해 동서로 나눠 가진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사진=위키피디아


폴란드, 불가침조약 맺은 소련·나치독일 협공으로 비극


중화민국뿐 아니라 폴란드‧소련도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대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고 비극적인 전란을 겪었다. 폴란드는 32년 소련과, 34년 나치 독일과 각각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침공에 이어 9월 17일엔 소련의 공격을 받고 나라가 분할 점령됐다.
1941년 소련에 침공한 나치 독일의 소속이 확인되지 않은 무장대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집단 묘지를 파놓고 소련 국민을 학살하고 있다. 독소전에서 소련인 2000만 명이 희생됐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소련도 불가침협정 맺은 나치 침공으로 2000만 몰살


소련도 마찬가지다. 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41년 6월 22일 독일의 침공으로 국토 서부가 초토화하고 2000만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피를 흘렸다.
1936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고 있다. 앞줄 가운데는 소련 외무장관인 바체슬라프 몰로토프, 그 뒤에 서있는 사람이 나치 독일의 외무장관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벽에 소련을 세운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진이 보인다. 이 협정은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면서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폰 리벤도르프는 제2차 대전 종전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유럽』(글항아리)에 따르면 비인간적 체제인 나치와 소련공산당은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의 주도로 각각 엄청난 살육극을 벌였다.
소련을 침공한 나치 독일의 친위대(SS) 산하 학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특수작전집단) 소속 무장대원이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 근접 거리에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 인류에 대한 범죄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폴란드의 비극과 소련이 나치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은 평화나 불가침 협정이나 조약이 국제정치적 환경에 따라 순식간에 휴지화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정치퍼포먼스 아닌 힘과 의지만이 평화 보장


북한이 10월 11일 개최한 국방발전전람회 '자위-2021'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격 사진 세 점(흰색 원)이 공개됐다. 조선중앙통신이 12일 공개한 사진에 따르면 전람회장 내부에 김 위원장은 야외에서 흰색 또는 검은색 인민복을 입고 조준경이 부착된 소총을 들거나 겨누는 사진이 걸렸고 참석자들이 이를 관람했다. 조선중앙통신 홈페이지 캡처=연합뉴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는 국제사회에서 평화를 위해 필요한 건 정치적 퍼포먼스가 아니라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시너지를 만드는 동맹, 그리고 정교한 정보력과 정세 판단일 것이다.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10일 당 창건 76주년 기념일을 맞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1일 보도했다. 김 총비서는 당 차원에서 중요한 과업들을 재차 강조했으며 별도의 대외 메시지는 내지 않았다. 노동신문=뉴스1
사실 남북한은 언어‧역사‧문화를 공유하고 통일에 대한 열망에서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인권‧민주주의‧시장경제 등 가치관에선 차이가 너무도 크다. 통일에 대한 방법론과 통일 뒤에 지향하는 국가에서도 천양지차다.
북한 노동당 창건 76주년을 맞아 청년학생들의 야회 및 축포발사가 1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됐다고 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11일 보도했다. 신문은 청년학생들이 김정은 당 총비서에게 ″최대의 영광을 올리며 환희로운 춤바다를 펼치었다″라고 전했다. 노동신문=뉴스1
76년 전 쌍십협정에서 통일 뒤 어떤 국가를 이룰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공산당에 시간을 벌어준 것이 국민 정부에게 통한의 한이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 종전협정을 추구하려면 북한으로부터 비핵화와 남침 포기에 대한 약속과 실질적인 실천방안을 확보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쌍십절과 함께 생각해야 할 한반도의 과제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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