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 영화몽상] K콘텐트 열풍이 불기 전에

이후남 2021. 10. 1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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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남 문화디렉터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는 활기가 감돈다.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난해와 달리 개막식·레드카펫 행사가 열려 낯익은 스타들과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에도 반가운 얼굴은 임권택 감독이었다. 임상수·봉준호 등 시상자로 나온 후배 감독들의 축하와 함께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는 모습이 한국영화의 현재진행형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그가 100여편의 영화를 만든 60여년의 시간은 한국영화사 전체와 절반 이상 겹친다. 요즘 젊은 영화감독이나 감독 지망생들이 상상하기 힘든 이력이다. 멀티플렉스가 아니라 단관 극장에서 ‘서편제’의 기록적 흥행 신드롬을 낳은 것도, 역대 한국영화 초청작 자체가 손에 꼽을 정도였던 칸영화제에서 ‘취화선’으로 처음 감독상을 받은 것도 그렇다.

임권택 감독. 1990년대 ‘장군의 아들’ 촬영 무렵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그처럼 20대 젊은 나이에 감독이 된 것 역시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이다.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영화광이거나 영화를 전공한 건 아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당대에 나온 소설은 “거의 다 통달했다”고 할 정도였지만, 영화의 매력에 빠진 것은 나중이다. “나는 영화계에 들어와서 영화라는 게 참 재미있고 좋구나 알게 됐어요. 그런 사람이 영화를 하고 영화감독으로 평생을 살 줄은…. ” 개막식 다음 날 잠시 만난 자리에서 그가 한 말이다.

지금은 동서대에 그의 이름을 딴 임권택영화예술대학이 있지만, 정작 그는 대학을 다닌 적 없다. 부친의 좌익활동 여파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10대 시절 집을 나온 그는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 밝힌 얘기다. 영화판이 요즘 말로 스펙이나 배경을 따지는 곳이었다면, 이런 청년이 훗날 거장은커녕 감독이 될 기회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영화계는 차별이 없어요…영화계만큼은 ‘빽’ 때문에 잘 될 수가 없어요. 성과를 내는 것뿐이죠.” 데뷔 전후를 돌이키며 그가 한 말이다.

지금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적 성과는 놀랍다. 어느새 가요 대신 K팝으로 불리게 된 한국 가수의 노래가 빌보드 1위를 하고,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고,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넷플릭스 인기 1위에 오른다. 격세지감이 든다. 2002년 ‘취화선’이 칸 감독상을 받은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마치 올림픽 주요 종목에서 한국이 첫 메달을 딴 것 같았다.

스포츠와 달리 대중문화는 국가대표가 없다. 공공의 정책적 지원은 판을 깔아주거나, 깔린 판이 잘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흥행이란 냉혹한 잣대에 살아남는 것도 그렇지만, 대중의 인정이나 영화제 수상 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도 창작자 스스로의 분투에서 출발한 결과다. 물론 이 판이 계속 잘 굴러가게 하려면 숙제는 있다. 청년 임권택이 그랬듯 새로운 세대, 젊은 세대가 재능을 키우고 발휘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후남 문화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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