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교과서 밖에서 만나는 시인 윤동주의 자화상

성선해 2021. 10. 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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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문학관을 찾은 박하윤(왼쪽) · 홍성택 학생기자. 문학관은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산책로였던 인왕산 자락에 있다.

혹시 이 시를 읽어본 적 있나요? 윤동주(1917~1945) 시인의 대표작 '서시'의 일부예요. 그는 교과서와 각종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이죠. 그런데 7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윤동주 시인이 오늘날까지 왜 이렇게 사랑받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요. 그의 작품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뿐 아니라, 일제의 억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었어요. 또한, 우리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펜으로 일제에 저항한 시인이기도 하죠. 박하윤·홍성택 학생기자가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 홍미영 도슨트와 만났어요.

홍미영(맨 오른쪽) 도슨트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윤동주 시인에 대해 설명했다.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이 종로구 청운동에 들어선 이유가 궁금해요." 성택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후배 정병욱과 하숙했어요. 당시 윤동주는 종종 효자동길을 따라 인왕산을 산책한 뒤 학교로 향했다고 해요. 그래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이곳에 2012년 윤동주 문학관을 만들었죠."(홍) 총 3개의 전시실을 갖춘 윤동주 문학관은 본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였던 공간을 개조한 겁니다. 제1전시실인 시인채에서는 인간 윤동주의 생애를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한 사진과 친필 원고 사본을, 제2전시실인 열린 우물에서는 시인의 대표작 '자화상'을 모티브로 한 공간을, 제3전시실인 닫힌 우물에서는 시인의 일대기와 작품을 영상물로 감상할 수 있죠.

제1전시실 한가운데 있는 윤동주 생가 우물 목판 원본. 이 우물 옆에 서면 시인이 어릴 적 다니던 학교와 교회 건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어났어요. 명동촌은 19세기 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마을이죠. 전시실 한복판에는 시인의 생가에 있던 우물 목판 원본이 전시돼 있었어요. "해당 우물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거예요. 이 우물 옆에 서면 시인이 어린 시절 다니던 학교와 교회 건물이 보였다고 해요."(홍) 이후 윤동주 시인은 명동촌의 교육 중심지였던 명동학교를 거쳐 평양 소재 숭실중학에서 공부했어요. 이 시기 7개월 만에 15편의 시를 썼죠. 당시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조선인에게도 주입하기 위해 일본의 종교 사원인 신사(神社)참배를 강요했어요. 이에 반발한 윤동주 시인은 숭실학교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이후 그는 길림성 용정 소재 광명학교 중학부에 편입해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여기서도 약 50여 편의 시를 썼어요.

연희전문학교 시절 함께 하숙하며 단짝으로 우정을 나눴던 정병욱(오른쪽)과 윤동주.


시인의 작품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40년 연희전문학교(오늘날 연세대) 문과에 입학하면서부터예요. "윤동주 시인의 부친은 아들이 문과가 아닌 법대나 의대로 진학하길 기대했어요. 윤동주는 부친과의 대립 끝에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기 문과를 택했죠." 홍 도슨트가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이 시기 그는 조선어와 역사, 영문학 등을 배웠죠. 특히 윤동주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한글학자 최현배 교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일제의 조선어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임에도 한글 시를 쓰게 됐다고 해요. 연희전문 문과대 교지에 실린 '새로운 길' 등도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작성됐죠.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시절 창작한 시들을 모아 3부로 만든 시고집 중 일부.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후배 정병욱 보관본이 유일하다.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은 '별 헤는 밤' '서시' 등 시인의 대표작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해요.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 구절이 바로 '별 헤는 밤'의 일부랍니다. 1941년 11월 5일 졸업을 앞두고 쓴 작품이죠. 멀리 떨어져 있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 시작해 자아 성찰까지 담은 자유시예요. 이 시기 윤동주는 한국 문학사에 엄청난 발자취를 남겼지만, 전시된 연희전문학교 시절 사진 속 그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풋풋한 얼굴의 대학생이었어요. 하지만 식민 지배로 고통받는 조국을 향한 고뇌와 독립을 향한 열망이 그를 저항 시인으로 만들었죠.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 이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살아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윤동주는 부친의 권유로 유학을 결심하고 1942년 4월 일본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고, 같은 해 10월 교토 도시샤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학했어요. 그가 유학 시절 쓴 시 중 5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데요. 그중 하나인 '쉽게 씌어진 시'에서는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생활하는 식민지 청년의 고뇌를 엿볼 수 있죠.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학적부. 일본 유학을 위해 오랜 고민 끝에 창씨개명을 택한 흔적이 있다. 이름 위로 붉은 줄이 그어지고, 히라누마(平沼)라는 성이 이름 앞에 붙었다.

당시 일본은 연합국을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인 태평양 전쟁(1941~1945)을 벌이고 있었기에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울 만큼 분위기가 뒤숭숭했어요. 이에 윤동주는 귀국을 준비했지만, 다시 조선 땅을 밟기도 전 일본 경찰에 체포됐어요. 한글로 된 시를 지속해 쓰면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이었죠. 결국 그는 1944년 3월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고, 1945년 2월 16일 생을 마감했어요.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이었죠.

왼쪽부터 시인의 사후 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과 증보판, 문고판.

"윤동주 시인은 어릴 때부터 활발히 활동했는데 정작 시집은 사후에 발간됐다고 들었어요."(성택) "맞아요. 원래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창작한 시들을 모아 시집을 내려고 계획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죠. 결국 19편의 시를 묶어 3부로 만들어 1부는 스승 이양하 교수에게, 다른 1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어요. 나머지 1부는 자신이 보관했죠."(홍) 그의 시집 발간 좌절은 일부 작품이 일제의 검열에 걸려 그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 것 같으니 때를 기다리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어요. 광복 이후인 1948년이 되어서야 연희전문 무렵은 물론 일본 유학 시절 쓴 시까지 함께 31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유고 시집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죠. 제1전시실에서도 초판 발행 당시 표지를 그대로 재현한 시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2전시실은 윤동주의 대표작 '자화상'에 모티브를 얻어 우물처럼 생긴 공간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형태로 꾸몄다.

윤동주 생애를 전시품과 함께 살펴본 소중 학생기자단. "이제 제2전시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홍 도슨트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는데요.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제2전시실이란 팻말만 있고 전시품이 없었죠. 그저 뻥 뚫린 천장과 시멘트로 된 통로, 무성한 풀숲만 있었습니다. "하하, 놀랐나요? 이곳은 언뜻 보면 제1전시실과 제3전시실을 연결하는 통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외딴 우물을 들여다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사나이의 이야기인 '자화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꾸민 곳이에요. 그래서 이 공간을 '열린 우물'이라고 부르기도 해요."(홍) 제2전시실은 본래 물탱크였던 공간인데 천장을 없애서 낮에는 푸른 하늘과 바람을, 밤에는 별을 느낄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시인의 시집을 들고 전시실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다 보니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풀과 하얀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어요. 마치 '자화상'에 등장하는 우물 속에 실제로 들어온 것만 같았죠.

윤동주 문학관에서는 시인의 생애를 보여주는 사진과 친필 원고 사본, 일대기를 담은 영상, 대표작으로 꾸민 다양한 전시품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3전시실에서 윤동주 시인의 생애를 재구성한 영상을 감상할 차례예요. 철제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물때가 남은 거친 벽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시인이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의 차가운 감방이 연상되는 공간이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감상한 약 13분 길이의 영상에는 시인의 일생과 시 세계가 담겼어요. 문학을 사랑하던 재능 많던 소년이 타국의 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과정은 당시 일제에 침탈당한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해요. "방송에서 이름만 몇 번 들어본 분이었는데 이런 삶을 살다 가셨는지는 몰랐어요. 청소년에 추천하고 싶은 시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은 무엇이 있을까요?"(성택) "아까 말했던 '새로운 길'을 추천해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쓴 시인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젊은이의 활기가 담겼죠."(홍)

윤동주가 즐겨보던 책들의 표지. 특히 백석 시집, 정지용 시집, 영랑 시집 등에 애착을 가졌다고 한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활동하던 시인들이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인이라는 딱딱한 수식어를 걷어내고 인간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간 소중 학생기자단. 그의 작품과 감수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문학에 두각을 보인 천재 소년이었던 그 역시 해방된 조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학생이자 청년이었으니까요. 하늘은 높고 바람은 선선한 독서의 계절 가을, 여러분도 가슴 속에 품고 싶은 시를 찾는 여행을 떠나보세요.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더 깊고 넓어진답니다.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예전에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시를 읽었던 적이 있는데, 그 뒤로 시가 재미있게 느껴졌어요. 이번 취재에 참여하고 싶었던 이유죠. 처음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다른 박물관에 비해 다소 규모가 작지 않나 생각했어요. 나중에 물탱크였던 공간이 전시실로 개조된 거라는 사실을 듣고 나니 신기했어요. 개인적으로 짧은 시를 좋아하는데 홍미영 도슨트님이 추천해주신 '새로운 길'이란 작품도 기억에 남아요.

박하윤(경기도 서원초 4) 학생기자

시 쓰기에 관심이 많아서 평소 윤동주 시인의 작품을 즐겨 읽어요. 시집은 물론 시인과 관련된 책도 사서 읽었죠. 이번 취재를 통해 윤동주 시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슬프면서도 아름다웠어요. 특히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 부분이 마음 아팠어요. 홍미영 도슨트님이 설명해주신 '새로운 길'은 저도 몰랐던 작품인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홍성택(경기도 솔개초 4) 학생기자

글 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지다영(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박하윤(경기도 서원초 4)·홍성택(경기도 솔개초 4)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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