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기의 소통카페] 공존을 부정하는 말은 폭력
고향의 누님이 어김없이 전화를 주는 때가 있다. 동생의 글에 대해 비방·욕설·저주가 담긴 댓글을 읽는 경우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여당이 추진했던 언론중재법을 둘러싸고 국내외적으로 극심했던 논란의 와중에서 언론재갈법이 될 우려를 표명하고 민주적 공동체를 형성·유지·발전하는 데 핵심인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는 법은 어떤 이유로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내 주장을 혐오한 댓글을 읽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피붙이에 대한 애틋함에 대해 감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먹물 티를 좀 내며 조언한다. 낌새가 나쁘면 읽지 않는 ‘선택적 회피’, 좋은 것만 읽는 ‘선택적 노출’, 기분 상하게 하는 것은 깔아뭉개거나 얕잡아 보는 ‘정보원 부정’을 권한다.
인터넷 초창기에 댓글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공론의 장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다. 또한 기자가 아닌 일반 시민이 의견과 주장을 펼칠 수 있고, 주류 미디어에서 여론을 경시·편향·왜곡할 경우에 도전과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라는 특성도 강점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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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설·비방 넘치는 온라인 댓글
막말 난무하는 대선후보 토론
메르켈의 퇴임 메시지 배워야
」
그러나 그 댓글 공간을 말다툼, 인신공격, 비방, 욕설, 명예훼손, 막말, 언어공격, 여론 조작과 같은 혐오와 폭력의 말이 차지하게 되면서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국내외적으로 민주적 선거에 탈법적으로 악용되고, 사실을 부정하는 확증편향의 비도덕적 표현 도구가 됨으로써 대의민주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다.
어디 댓글만 그러한가. 댓글 부대가 따라다니는 정치인의 언행이 품격을 잃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 억지의 막말을 계속해대니 실망과 분노를 넘어 무감각, 탈감각 상황에 이르렀다. 댓글은 그나마 익명이라는 가면의 뒤에 숨어서 하는 밀실의 언어이지만, 정치인의 말은 플랫폼과 마이크와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국민을 향해 하는 광장의 말이다. 그래서 더욱 품격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무자비한 행동대장으로 사생결단의 첨병이 되고 있다. 정치인의 말이 ‘논쟁적’을 넘어 ‘폭력적’이 될 때 피해자는 대한민국 공동체이다.
지난 5일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공중파 토론에서 한 후보는 여당 후보자를 향해 “부동산 투기의 마피아 두목, 당신의 가면을 찢어버리겠다”고 외치며 얼굴이 그려진 사진을 찢었다. 지난달 29일 여당의 유력 후보자는 제1 야당을 ‘도적떼’, 원내 대표를 ‘도적떼의 수괴’로 불렀다. 전임 대표가 야당을 도둑놈이라고 칭하며 정권을 맡길 수 없다고 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야당 원내대표를 남극으로 위리안치 하겠다고도 했다. 남극은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위리안치는 귀양 죄인이 사는 곳을 가시나무로 둘러싸서 출입과 소통을 금하는 벌이다.
이러한 언행은 여야를 막론하고 상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대착오적인 폭력이다. 또한 여당 후보자는 ‘대장동 의혹’을 ‘토건족’의 문제라고 했다. 토목·건설·건축분야 종사자들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획일화하는 위험한 표현이다. 출신·외모·신념·집단·지역·직업·약자·경제력·성별·인종에 따라 경계를 짓고 편을 가르고 희생양으로 삼는 것은 인류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한민국도 이미 충분히 시달렸다.
선거의 계절이다. 아니 계절이 따로 없을 만큼 선거는 상시적인 존재가 됐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 날부터 다음 선거의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팽창한 선거의 공간이 국민을 유혹하려는 교언영색의 말과 자극적인 주장의 말로 채워지고 있다. 플라톤을 위시한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공동체의 진실과 공익을 외면하고 사익과 승리만을 위하는 말을 궤변론자의 궤변이라고 했다.
지난 16년간 독일과 유럽을 이끌고 세계인의 박수를 받으며 물러나는 메르켈 총리의 대국민 메시지가 새삼스럽다. “오늘날 우리는 언론의 자유같이 가치 있는 자산들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을 목도한다” 며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매일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공존의 가치를 부정하는 말은 폭력이다. 선거공간과 국민을 어지럽히는 말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까닭이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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