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하던 결혼 생활, 이 여성 작가가 내린 대담한 선택
[이지애 기자]
가족들과 동선이 부딪치지 않도록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이리저리 집안을 옮겨 다닐 때가 있다.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주체할 길 없이 차오를 때다. 존재로서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엄마 역할, 아내 역할로만 기능한다고 느낄 때 특히 이런 마음이 든다. 몸살 기운에도 가족들의 끼니를 위해 어김없이 부엌으로 향해야만 한다거나 아픈 손목을 달래 가며 하는 집안일이 가족들의 협조를 구한 후에도 늘 나의 일로만 남을 때 그렇다.
가족들은 나의 정서적, 물리적 수고로움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정작 내가 도움받고 관심이 필요한 때에는 무관심과 방관으로 대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비애감에 휩싸이다 못해 정말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함께여도 이렇게 외로운데, 억울함과 서러움을 쌓아가며 굳이 가족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난 세월을 잘못 살아왔거나 아님 너무 오래 함께 살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노년에 접어든 주변 여성 분이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결혼생활 50년째인데, 남편과 뜻이 안 맞아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말이다. 평생 남편의 성미와 입맛에 맞추느라 인내하며 고되게만 사셨으니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살고 싶으신 그의 심정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남편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심정이, 종종 격하게 혼자 살고 싶어지는 나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혼이든, 혼자 살기든 하고 싶다 해서 바로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자유를 얻는 대신,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선택이 가져올 혼돈과 불안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용기 낸 선택의 대가가 자유는커녕 불안과 혼돈에 무릎 꿇는 후회일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개선의 여지가 잘 보이지 않는, 소외감만 심화되는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은 더 없다. 생기 없는 날들로 남은 인생을 메우며 꾸역꾸역 살아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책 '살림 비용'. |
ⓒ 플레이타임 |
마침,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살림 비용>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다. 데버라 리비는 나이 50에, 기꺼이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고 자유를 위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여성이 역시 있긴 있었구나 싶어 참 반가웠다. 그가 찾아낸 새로운 삶은 어떤 건지, 자유를 얻기 위해 어떤 비용을 치러냈는지 궁금했고, 나도 그처럼 용기 낼 수 있을지 가늠해 보고 싶었다. 그는 사랑의 균열을 깨닫고 분한 마음과 비난으로 들끓는 밤들을 보내다 결혼 생활을 멈추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말한다.
"남자와 아이의 안위와 행복을 우선순위로 두어 오던 가정집이라는 동화의 벽지를 뜯어낸다는 건 그 뒤에 고마움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무시되거나 방치되어 있던 기진한 여자를 찾는다는 의미다. 모두가 즐거이 누리는 가정, 순조롭게 기능하는 가정을 짓는 일은 수완과 시간과 헌신과 공감능력을 요한다...(중략) 이러한 작업은 여전히 십중팔구 여자의 일로 치부되며 그 결과 이 막대한 과제를 얕잡는 온갖 단어가 난무한다."(p.21)
'스위트 홈'이라는 포장 아래 가정의 안락을 위한 책무를 도맡으면서도 하찮게 여겨지는 여자의 억울함을 이리 속시원히 짚어주니 고마운 마음이다. 가족들과 한 울타리 안에 있지만 존재로 이해받지 못해 겉도는 기분을 느끼는 게 나뿐만이 아니구나 싶어 이 구절만으로도 이미 위로가 된다.
▲ 가지고 싶은 것, 자유롭게 나자신을 위해 충실한 삶 |
ⓒ Unsplash |
모아둔 물로 변기 물을 내리고, 꽉 막힌 세면대를 뚫으며, 글을 쓰다가도 딸의 저녁을 챙기려 헐레벌떡 언덕길을 오르는, 한층 고단한 삶을 마주했다. 그 와중에 의지하던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정말 고난은 떼로 몰려오는가 싶다. 하지만, 데버라는 무너지지 않았고, 자초한 고행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살기 위해 더 많은 일감을 받았고, 더 집중했다. 이혼 전보다 훨씬 고되었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리는 맑고 명쾌해졌으며 체력적으로 더 강인해졌다고 고백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더 만들고, 친구들을 집으로 더 자주 청했다. 아내로서 썼던 가면을 벗어버리고, 깊은 사색을 통해 지나온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현재에 이른 자신을 점차 받아들여 갔다. 그렇게 데버라는 자유를 쟁취하는 데 수반하는 비용을 기꺼이 치러냈다. 고난을 이겨내고 기어코 성장해내는 일은 늘 감동이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헌신하고 우리를 시중드는 자아가 아닌, 우리 너머에 있는 당신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자아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우리의 보호자이자 양육자여야 하는 어머니의 신화적이고 원초적인 사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p.106)
정말 그렇다. 고등학생인 우리 집 작은 애는 내가 글 쓰는 걸 탐탁지 않게 여긴다. 글 쓰는 시간 동안 자기에게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을 무척 서운해하고 심지어 분개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작은 애의 비위를 맞추느라 할 일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 충실하고자 하는 일에 괜한 미안함을 느끼는 게 못마땅하던 차였다.
내가 느끼는 미안함은 아마, 가족을 최우선으로 삼는 희생과 인내를 엄마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여기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어머니가 되어 배우는, 이 견디고 인내하는 심성을 데버라는 '치명적 인내심'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주입된 이 '치명적 인내심'이야말로 자신을 위해 충실히 살려는 스스로를 해치는 길이며, 이 인내심에 길들여져 다른 사람의 상상대로 사는 건 자유가 아니라고 역설한다.
▲ 서로 각기 새로운 선택을 취할 수 있음을 상호 인정한다면... |
ⓒ Unsplash |
글 쓰는 시간이 미안하다고 나도 가족들의 안위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다른 이의 기대에 맞추느라 허덕대다가 점점 더 외롭고, 괴로워지는 자신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 대신,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상상해 봐야겠다. 그리고 그 삶을 구현해 낼 용기와 의지와 열정을 내어봐야겠다. 그 삶이 어떤 모양새일지 다양한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처한 굴레를 넘어서는 희열이 벌써 느껴지는 듯하다.
결혼할 때 백년해로를 꿈꿨다 해서 저절로 백년해로가 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립적 존재로서 언제든 각기 새로운 선택을 취할 수 있음을 상호 인정할 때, 타성에 젖은 관계에서 벗어날 힘을 그리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앞에 두고 비로소 삶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이 우러나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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