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억 한옥상가, 38억 사무실..공공자산만 불리는 도시재생

한은화 2021. 10. 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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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재개발에 나선 도시재생 지역
동네 인프라 낡고 형편없는데
공동체 강조, 공공시설 건립만
"제도 설계 잘못, 방향 전환 필요"
서울 종로구 누하동 필운대로 옆에 지어진 도시재생지원센터. 부지 매입비와 수선비를 합쳐 38억원을 들였지만 현재 사실상 활동가들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한은화 기자

서울의 주요 재생사업지마다 재개발 바람이 불고 있다. 서울의 도시재생 1호 사업지였던 숭인동은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민간 재개발 후보지 공모에 1호로 접수했다. 숭인동과 함께 재생사업을 했던 창신동도 공공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도시재생 사업을 하는 경복궁 서측 지구(서촌)의 경우 곳곳에 ‘한옥보전지구 해제, 경복궁 역세권 개발 적극 추진’이라 적힌 플래카드가 내걸리기도 했다.

도시 재생 사업은 올해로 7주년을 맞았다. 2013년 도시재생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박원순 전 서울 시장은 뉴타운의 출구전략으로 재생을 택했고, 이후 문재인 정부가 주요 국정과제로 도시 재생을 꼽으면서 5년간 5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재생 붐이 일어났지만, 성적표는 좋지 않다. 창신동의 한 주민은 “재생사업은 일종의 사기이자, 예산 낭비였다”고 성토했다. 무엇이 문제였으며, 도시의 재생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 서촌과 창신동, 두 재생사업지의 현재를 살폈다.


공공 거점시설만 지으면 재생이 될까


서촌에는 최근 재생사업의 일환으로 120억 규모의 2층 한옥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지난해 주민 거점시설로 쓸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짓기 위해 한옥 매입과 수선비로 38억원을 썼는데, 여기에 추가로 100억대의 지역거점시설을 짓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계획이 뒤늦게 알려져 주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서울시는 서촌 도시재생지원센터 옆 6개의 한옥 필지를 사서 2층 한옥을 신축할 예정이다. 도시재생 사업비의 대다수를 이 지역거점시설 건립에 쓰게 된다. 한은화 기자
서촌은 2019년 도시재생사업지로 선정된 이후 도시재생지원센터를 주축으로 관련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서촌은 준공 후 20년 이상 된 건물이 84%인 노후한 동네로, 과거 서울시가 지정했던 재개발 정비예정구역이 세 곳이나 된다. 이에 재생 사업 계획 단계에서 노후한 기반시설과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실제로 추진되는 안은 180도 달랐다. 김소양 서울시의원(국민의힘)이 8일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경복궁서측 도시재생활성화계획’에 따르면 서울시는 이미 조성된 도시재생지원센터 옆 6개 필지(총 대지면적 735.8㎡)를 매입해 또 다른 지역거점시설을 신축할 예정이다. 120억원을 들여 2층 한옥을 짓는데 상가ㆍ돌봄시설ㆍ한옥 놀이마당 등으로 쓴다는 계획이다. 이 거점시설과 도시재생지원센터의 인건비와 운영비까지 합치면 약 150억원에 달하는 프로젝트다.

재생사업의 예산은 100억원으로 국토부 뉴딜사업에 선정될 경우 100억원이 추가된다. 결국 국토부 뉴딜 사업에 선정돼 예산이 200억원으로 늘더라도 공공 소유인 거점시설 구축에만 대다수 예산을 쏟아붓는 셈이다.

현재 도시재생지원센터는 몇몇 활동가를 위한 38억짜리 한옥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당초 사무실과 주민 거점시설로 쓴다는 계획이었지만 코로나 19등의 영향으로 이용이 원활하지 않다.

최근 서촌 일대에 걸린 재개발 플래카드의 모습. [사진 독자]

서촌 주민 이 모(75) 씨는 “주민들이 소방도로를 확충해달라고 하니까 작은 필지를 매입해 골목길을 넓히고 낡은 기반시설을 바꿀 거라고 홍보하더니 난데없이 대로변의 한옥을 사서 또 공공 한옥으로 만든다고 한다”며 “주민과 상관없는, 주민들은 모르는 깜깜이 재생사업이 추진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미 서촌 일대에는 6채의 공공 한옥을 비롯해 공공 소유 건축자산이 많다. 하지만 평일 낮 시간대에만 운영되거나 주민들이 이용할 수 없는 곳이 대다수다. “정부와 지자체가 근원적인 인프라 개선은 외면하고 각종 예산으로 공공 자산 늘리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촌 재생사업을 추진하는 서울시 한옥정책과의 한 관계자는 “기존 도시재생의 보완된 버전인 도시재생 재구조화 방향에 따라 재생지역에서 실제 필요한 기반시설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정·보완해나가고 있다”며 “주민과 협의해 보완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정화조 없는 창신동을 재생할 수 있었을까


도시재생 1호 사업지였던 창신동의 모습. 현재 창신동은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한은화 기자
“주민들은 첫째도 도로, 둘째도 도로, 셋째도 도로를 원했어요. 그런데 도로가 어디 하나 넓혀지거나 뚫린 곳이 있나요. 1000억원이 대체 어떻게 쓰였는지 주민들은 아직도 잘 모릅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만난 주민 양 모(52) 씨의 이야기다. 창신ㆍ숭인동은 2014년 국토부가 실시한 도시재생 선도지역 공모에 뽑히면서 서울의 1호 재생사업지가 됐다. 뉴타운 출구전략으로 재생이 처방됐지만, 동네는 되려 재생의 덫에 빠졌다. 개발보다 보전이 강조됐고 당장 시급한 기본 정비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예산은 어디로 갔을까. 초기에 재생사업의 마중물 격으로 투입된 200억원의 사용처를 살펴보니 70% 이상을 서촌과 비슷한 공공 시설물 조성에 썼다. 사실상 활동가들의 사무실로 쓰이는 주민공동이용시설(82억원)이나 봉제 역사관(32억원), 백남준 기념공간(11억원), 채석장 부지 일대 명소화(14억원) 등에 사용됐다. 도로에 대한 투자는 녹화사업에 그쳤다. 양 씨는 “푸른마을을 가꾼다며 차 댈 곳도 없는 좁은 골목길에 값비싼 맞춤형 철제화분을 쭉 설치했다가 민원이 폭주하니 결국 폐기 처분했다”며 “재생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도로를 확충해주겠다더니 주민들은 사기당했다”고 말했다.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골목길 녹화를 위해 설치한 철제화분. 그나마 남아 있는 것으로 더 좁은 골목길에 설치했던 화분들은 모두 철거됐다. 한은화 기자
주민공동이용시설로 지은 공간. 사회적기업이 운영하는 동네 라디오 방송국이지만 현재 코로나19로 문 닫았다. 한은화 기자
최근 골목 안 쪽 집에 화재가 발생해 철거된 모습. 정화조가 없는 집이었다. 한은화 기자

주민들이 한목소리로 ‘도로 확충’을 외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창신동은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으로 쓰던 돌산에 자리 잡은 동네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용하지 않는 채석장 주변으로 무허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섰다. 1970년대 들어 동네 양성화가 시작됐고, 필지를 묶어 최소한의 면적을 갖추면 공식적인 건축허가를 내줬다. 하지만 양성화가 됐더라도 경사지의,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에 위치한 집이 많아서 집을 고치거나 신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비탈길 안쪽의 집에 불이 났을 때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고 했다. 불타버린 집을 철거했는데 정화조가 없었다. 화장실의 오물이 하수관으로 그대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민 김 모(37) 씨는 “비탈길에 있는 투룸은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에 내놔도 길이 지저분하다고 외국인 노동자조차 외면한다”고 전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창신동의 인구는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는 동안(2016년~2020년) 2만3358명에서 2만873명으로 11%가량 줄었다.


이데올로기에 빠진 재생


도시재생 1호 사업지였던 창신동은 현재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한은화 기자
전문가들은 “재생 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도시재생을 먼저 시작한 영국의 경우 제조업에 기반을 둔 산업의 시대가 저물면서 도시의 쇠퇴를 겪었고, 도시재생이 해법으로 등장했다. 가장 먼저 도시가 경제적으로 살아날 수 있게 신성장 동력을 찾고,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며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계층이 없도록 공동체를 살폈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가장 나중인 공동체 활성화를 가장 우선시하니 문제가 더 꼬였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오래 살 수 없는데 공동체 활성화가 될 수 없었다. 경제적 해법으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주로 투입한 결과, 공공의 지원 없이 자생하기 어려웠다. 재개발의 반대급부로 재생이 거론되면서 정비를 터부시하는 풍토까지 자리 잡았다.

구자훈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과거 주거환경특별법을 토대로 낙후한 동네에 도로를 내고 주차장을 만들어주는 사업을 했지만, 도시재생 사업이 추진되면서 정비라는 개념이 아예 빠졌다”며 “낙후한 지역에 기반시설을 정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 자체가 없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연구원에서 도시재생연구센터장을 역임한 장남종 박사(동해종합기술공사 부사장)는 “도시재생을 위해서 경제ㆍ공간ㆍ사회의 세 축이 고루 살펴져야 하는데 지나치게 온정주의, ‘따뜻한 재생’으로 쏠리며 재생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 문제였다”며 “제도 설계가 잘못된 만큼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정부 주도로 생활 SOC만 짓는 것도 지속가능한 재생이 될 수 없다. 공공이 만든 각종 시설을 유지하려면 추후 건립비만큼의 운영비가 든다. 이런 상황에서 50조 규모의 뉴딜 사업이 끝난 뒤 재생에 성공한 도시는 과연 몇이나 될까. 구 교수는 “공무원들이 사업 기간 안에 행정적으로 마무리하기 좋은 사업만 하려고 하는데 도시재생은 주민과 협의해 장기적인 계획을 짜서 차차 실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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