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정치지형 '좌회전 깜빡이'

김이현 2021. 10. 9.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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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각국 선거 좌파 약진
코로나로 절박해진 먹고 사는 문제.. 복지·일자리 공약 각광
게티이미지뱅크


불과 10년 전만 해도 좌파는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독일 등 주요 국가 선거에서 연전연패했다. 심지어 2010년대 중반에는 ‘복지국가’로 좌파가 강세를 보이는 북유럽 국가들에서도 대부분 우파가 집권했다. 난민 위기가 닥치면서 ‘극우’ 세력이 약진한 까닭이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주장한 ‘제3의길’을 기반으로 좌파가 유럽의 주도권을 잡았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만했다.

그런 유럽에 좌파가 돌아오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영향력이 강한 독일 총선의 결과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독일, 북유럽, 이탈리아 등에서 좌파 선전
중도좌파 사민당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실시된 독일 연방의원 총선거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한 뒤 프란치스카 기파이 사민당 베를린 시장 후보, 올라프 숄츠 사민당 총리 후보, 마누엘라 슈베지히 독일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지사가(왼쪽부터) 선거 다음 날 꽃을 들고 선거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 AP연합뉴스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독일 총선에서 사민당은 25.7%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16년 만에 1당을 탈환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소속 정당인 중도우파 기민·기사연합의 득표율(24.1%)과 큰 차이가 나진 않지만 전반적으로 진보 성향의 정당이 약진했다. 사민당과 함께 집권했던 경험이 있는 녹색당 역시 14.8%의 득표율로 118석을 얻었다. 역대 최다 의석이다. 좌파당 역시 4.9%의 득표율로 39석의 의석을 얻었다.

독일 총선의 2주 앞선 지난달 13일 진행된 노르웨이 총선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8년 만에 중도좌파 연합이 정권을 탈환했다. 이번 선거로 북유럽 5개국(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에는 1959년 이후 처음으로 동시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또 이탈리아의 중도좌파 진영은 지난 3~4일 치른 지방선거에서 밀라노, 볼로냐, 나폴리 등 주요 도시를 석권하면서 승리를 거뒀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등에서도 중도좌파 진영이 집권하고 있다.

이탈리아 중도좌파 민주당의 엔리코 레타(오른쪽) 대표가 지난 4일(현지시간) 토스카나주 시에나 지역구의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후 샴페인을 들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좌파 공약, 사회적 약자·환경 문제 등에 주효

유럽에서는 최근 선거에서 좌파의 선전 배경에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2010년대 중반을 휩쓴 이슈인 ‘난민’ 대신 ‘코로나19’가 선거의 주요 이슈로 자리 잡은 영향이 큰 것으로 해석된다. 독일에서 사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권 개선 등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노르웨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르웨이 노동당의 선거 슬로건은 ‘이제 평범한 사람들의 차례’였다. 이와 동시에 노동당은 고용권 보장, 노조 가입 활성화, 불로소득에 대한 세금 인상 등을 주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중도좌파의 이러한 공약은 적극적인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는 시민들, 코로나19로 삶이 위태로워진 간호사나 청소부, 플랫폼 노동자 등 최전방 노동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닐스 슈미츠 독일 사민당 의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번 선거는 난민, 즉 법과 질서나 유럽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며 “코로나19로 인해 복지와 일자리 같은 이슈가 큰 역할을 했다. 사민당이 강점을 보일 수 있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유럽의 유권자들이 민감한 ‘기후변화’도 좌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독일 총선에서 가장 약진했다고 평가받는 녹색당은 2035년까지 화석 연료 사용 퇴출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3당에 올랐다. 노르웨이 총선에서도 ‘석유 시추·생산 중단’이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중도좌파 연정에 참여할 것으로 유력한 사회좌파당이나 녹색당 등은 석유 시추에 대해 빠른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유로뉴스는 “석유 산업의 미래가 지배하는 선거 캠페인과 중도우파 정부의 종말”이라고 평가했다.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국가별로 전략적인 공약을 내놓으며 좌파가 최근 선거에서 선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에서는 중도좌파 사회노동당이 민영화와 긴축정책 반대, 해고 금지, 포용적인 이민 정책 등 좌익 포퓰리즘 성향의 포데모스와 연립 정권을 구성한 반면 덴마크 사민당은 반이민 정책을 일부 수용하면서 4년 만의 정권을 탈환했다.


사회민주주의 부활?… “성급”

중도좌파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기에 처했던 궁극적 이유는 바뀌지 않았다는 점에서 좌파에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전망도 나온다.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많은 중도좌파들의 전통적인 기반인 노조와 산업 노동자들이 사라지고 있다”며 “중도좌파 정당들이 이들이 작은 정당들로 분열되면서 그들의 표가 잠식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프랑스다. 프랑스의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당은 2017년 대선에서 10%도 얻지 못하고 패배한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20년 코뮌(시·군·구 이하) 단위 지방선거와 2021년 레지옹(광역) 단위 지방선거에서 좌파 계열은 신승했지만 사회당, 녹색당,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등으로 나뉘어 2022년 대선에선 뚜렷한 유력 주자가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사회당 출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까지 중도좌파 표심을 잠식하고 있다.

사회주의 전문가인 역사학자 알랭 베르구뉴는 NYT에 “사회민주주의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 시기상조였다면 르네상스가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과장”이라고 밝혔다.

유럽 흐름으로 ‘단정’… 한국엔 ‘글쎄’

그렇다면 유럽에서 나타난 좌파의 선전이 한국 정치,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대선에는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 국내에서도 코로나19 장기화의 여파로 자영업자들에 대한 손실보상은 물론 전국민재난지원금 지급 등을 통해 국가 재정의 적극적 역할과 사회 안전망 확충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의 기본소득 공약을 둘러싼 논의도 이어져왔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권이 유럽의 이슈와 정치사회적 흐름에 상대적으로 둔감하다는 점에서 미칠 영향이 크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사회적 불평등과 복지 정책, 기후 변화 등의 이슈에 유럽 유권자들이 민감한 것과 달리 한국에선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 있다”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미미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조홍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통상 선거 후 연립정권이 들어서는 유럽의 상황을 고려하면 좌파가 선전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며 “또 한국 정치와 유럽의 결은 달라서 영향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이현 기자 2hy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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