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형의 객석에서] 코로나에 멈춘 클래식?..천만에, 지루할 틈도 없었다
"슈퍼스타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로컬 히어로(Local Hero)’를 찾아야 한다."
2016년 음반사 워너 클래식의 알랭 랑세롱 대표가 방한했을 때 한 말이다. 메이저 음반사와의 계약이 실력을 입증하는 지름길이었던 때는 지나갔다는 의미였다. 정보가 빨라졌고. 음반을 감상하기 전에 유튜브를 통해서도 실력을 알 수 있게 됐다. 나라마다 환경도 판이하다. 당시 랑세롱 대표가 뽑았던 로컬 히어로는 한국의 조성진, 프랑스의 필립 자루스키, 미국의 조이스 디도나토 등이었다. 이들은 5년이 지난 지금 월드스타로 입지가 확고하다.
코로나19 창궐로 세계의 발이 묶여 입국과 출국이 힘들어진 2019년 말 이후 클래식 음악계는 종전의 글로벌 시대에서 본격적으로 ‘로컬의 시대’로 변모했다. 이전까지는 해외 최고의 트렌드를 리드하는 동시패션을 항공과 숙박으로 한국 무대에 소개하면 되던 일이 불가능해졌다. 2주간의 자가 격리보다 무더기 공연 취소가 이어지자 공연장과 기획사들은 국내로 눈을 돌렸다. 외국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이 국내 오케스트라로 바뀌고 해외 솔리스트가 국내 연주자로 교체됐다. 한편으론 우리가 가진 자원이 얼마나 풍부한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세계 수준에 근접했지만 기회가 적었던 연주자들은 전보다 더 기회를 누렸고,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연주자들도 전보다 큰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졌다. 좌석 간 띄어앉기로 매출액은 감소했지만 어쨌든 클래식 공연은 계속 이어졌다.
코로나19가 한창인 2021년, 세계 콩쿠르에서 한국인 연주자들이 거둔 좋은 성적은 로컬과 글로벌의 차이를 더욱 무색하게 했다.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첼리스트 한재민이 우승하고 바이올리니스트 위재원이 2위에 올랐다. 프라하의 봄 콩쿠르에서는 아레테 4중주단이 현악 4중주 부문 우승, 이동하와 이재영이 피아노 부문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몬트리올 콩쿠르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1위에 올랐다. 피쇼프 실내악 콩쿠르에서는 현악 4중주 부문에서 리수스 콰르텟이 우승했다. 카디프 콩쿠르에서 바리톤 김기훈이 우승했고 부조니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박재홍과 김도현이 나란히 1, 2위를 휩쓸었다. 가장 최근인 9월에는 요하네스 브람스 콩쿠르에서는 비올리스트 김근식이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세계 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K-클래식의 자부심은 커졌고,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와 협연자들의 연주에도 익숙해졌다. 언젠가부터 흐름은 정체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도 식어갔다. 이때쯤 새로운 자극을 준 공연들이 있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1위와 3위 연주자가 내한해서 리사이틀을 가진 것이다. 쇼팽 콩쿠르와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콩쿠르로 불리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올해 애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됐다. 본선 진출자 58명 가운데 한국인 연주자가 15명이나 됐다. 그러나 12명의 준결선 진출자 가운데 한국인은 동시에 몬트리올 콩쿠르를 치르고 있던 김수연이 유일했다. 김수연 역시 6명이 겨루는 결선에는 오르지 못했다. 연일 들려오던 한국인 입상 소식에서 다소 멀리 있었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수준을 서울에서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로컬 히어로들이었다.
9월9일 금호아트홀연세에서 본 2021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수상자 음악회의 첫 무대는 3위에 오른 일본의 무카와 게이고였다. 이미 에피날 콩쿠르 2위, 일드프랑스 콩쿠르 2위, 하마마쓰 콩쿠르 5위, 롱 티보 콩쿠르 2위에 올랐던 경력을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다. 베토벤 ‘월광’, 라벨 ‘밤의 가스파르’, 훔멜 ‘글룩 아르미드 주제에 의한 변주곡’, 쇼팽 왈츠 5번, 뱃노래 Op.60, 라흐마니노프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들려줬다. 게이고의 연주는 한마디로 섬세하고 진득했다. 건반에서 손을 뗀다는 느낌이 없고 해머가 항상 현 위에 놓인 듯한 연속성이 음과 음의 공백을 없애 주고 연주되는 곡에 집중하도록 청중을 몰고 갔다.
1주일 뒤인 16일 같은 곳에서 1위 수상자인 프랑스 피아니스트 조나탕 푸르넬의 연주를 봤다. 바흐 오르간 소나타 5번 BWV529 중 라르고였다. 사무일 파인베르크의 편곡 버전이었는데 물기를 머금은 듯 뭉근하게 가라앉는 피아노의 음향이 해머보다는 풍성한 오르간을 연상시켰다. 이어진 쇼팽 녹턴 17번에서는 연체동물 같은 손가락으로 독특한 울림을 보여줬다. 1부 마지막 곡인 쇼팽의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대 폴로네즈는 극도의 트릴과 맑은 고음, 심장을 두드리는 저음으로 듣는 이를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달렸다. 2부의 브람스 소나타 3번은 투명하고 광기 어린 연주였다. 마치 속이 보이는 투명한 만년필을 처음 봤을 때 같았다. 고지식하고 두껍게 느껴졌던 브람스의 텍스처가 한 올 한 올 페이스트리 빵처럼 명료하게 귀 속에서 직조되고 있었다. 느린 악장과 간주곡에서는 뭉근함이 명상적으로 내려앉았고 스케르초와 피날레에서는 작품의 전개를 반짝이며 표시했다.
앙코르는 바흐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과 쇼팽 소나타 3번 중 ‘스케르초’였다. 탄성을 자아내는 쇼팽 연주의 뒷맛이 여운처럼 남았다. 한국의 클래식 팬들 앞에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클래스를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한 국내 연주자 위주의 공연과 K-클래식의 승전보에만 빠져 있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가끔 이런 죽비 같은 자극이 클래식계엔 필요하다.
이보다 앞선 지난 4월20일에는 2019년 제1회 중국콩쿠르 우승자인 토니 윤 피아노 리사이틀을 봤다. 갓 스물이 넘은 중국계 캐나다 피아니스트로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수학 중이다. 바흐-부조니 ‘샤콘느’부터 강한 개성으로 시선을 잡아 끌었다. 건반을 두들기는 것이 아니고 페달을 이용해 물에 잠긴 듯한 뭉근한 음의 농담을 조절했다. 기교보다도 바흐 음악에 표하는 경의가 느껴졌다. 모든 음을 쏟아낸 뒤에도 떨림으로 음악은 계속 이어졌다. 부조니 편곡 바흐 ‘주여 내가 당신을 소리쳐 부르나이다’ BWV639은 서정적인 면모가 두드러졌고 섬세한 터치를 다양한 볼륨으로 조절했다. 베토벤 소나타 15번 ‘전원’은 가장 인상 깊었다. 음 하나하나를 소중히 하며 조성한 스토리텔링이 뚜렷했고 청중을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의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충분히 느리게 느긋하게 연주하면서도 귀를 붙들어 맨 2악장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2부 첫 곡 리스트 편곡 벨리니 ‘노르마의 회상’ S.394는 묘기의 연속이었다. 오른손과 왼손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이 악명 높은 난곡을 극한까지 끌고 갔다. 이어진 리스트 편곡 바그너 ‘파르지팔로부터의 거룩한 성배행렬’ S.450는 웅변보다 강력한 침묵의 서정성으로 성스러운 선율을 그려냈다. 아고스티 편곡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에서는 지옥의 춤, 자장가, 피날레로 이어지는 관현악 ‘불새’ 후반의 클라이맥스와 하이라이트가 피아노 한 대로 거의 완벽하게 재현됐다.
세계적인 콩쿠르 입상자들의 무대는 클래식 팬들에게 뉴페이스를 공급하는 동시에 콩쿠르의 브랜드 이미지로 질적인 수준을 보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9월15일 예술의전당과 통영국제음악제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상호 협력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번 MOU의 골자 중 하나가 통영국제음악제 주최 윤이상 콩쿠르 우승자의 예술의전당 주최 교향악축제 협연이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동시대의 트렌드를 호흡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연주자에게는 자기 홍보와 무대 경험, 커리어를 쌓는 이점이 있어 윈윈할 수 있다.
클래식 음악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콩쿠르 같은 등용문이 많아지고 등용문의 권위도 높아져야 한다. 콩쿠르 입상자들의 무대는 충만한 음악의 교감, 기대와 만족이 교차한다. 11월20일 통영국제음악당과 오는 12월1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자 김수연 피아노 리사이틀이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내년 3월에는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박재홍, 6월에는 게자 안다 콩쿠르, 9월에는 리즈 콩쿠르 우승자가 한국에서 공연 예정이다.
류태형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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