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화천대유와 인문학

송세영 2021. 10. 7.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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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고전인 '주역'이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을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든 대장동 게이트는 주역의 64괘 중 하나인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천화동인(天火同人)의 뜻을 전 국민이 알게 만들었다.

서구화 이전 동아시아인의 전통적 세계관과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인문학적 지혜를 경영에 접목하고 싶다는 바람에다 고전을 읽었다는 지적인 허영심,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싶다는 미신적인 기대까지 겹쳐 이런 수요가 창출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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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영 문화스포츠레저부장


동양 고전인 ‘주역’이 이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이 있을까.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든 대장동 게이트는 주역의 64괘 중 하나인 화천대유(火天大有)와 천화동인(天火同人)의 뜻을 전 국민이 알게 만들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까지 됐으니 올해의 유행어 1위에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다.

천화동인과 화천대유를 연결해 해석하면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큰일을 이룬다’는 의미다. 큰일이 큰돈을 버는 거라면 수천억원의 판돈에 어울리는, 기가 막힌 작명이다. ‘천하를 얻는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권력자와 자산가, 법조인에 조폭까지 등장하는 음습한 드라마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씨는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주역’을 탐독하며 감명을 받았거나 강의 때 들은 내용이 인상적이어서 이런 희대의 이름을 지었는지 모른다. 역술가가 떼돈 벌 수 있는 괘라며 작명해줬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문학이 탐욕과 협잡의 포장지로 이용된 것이니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사서오경 중 하나인 ‘주역’은 3000년 전에 쓰인 책이다. 점을 보는 점서(占書)로 간주하는 이가 많지만, 단견이다. 서구화 이전 동아시아인의 전통적 세계관과 지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경영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데 이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선 단골 메뉴다. 인문학적 지혜를 경영에 접목하고 싶다는 바람에다 고전을 읽었다는 지적인 허영심,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싶다는 미신적인 기대까지 겹쳐 이런 수요가 창출된 것 같다. 주역의 64괘 중 가장 길하다는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이 부동산개발회사의 이름으로 차용된 것만 봐도 그렇다. 돈 냄새를 잘 맡는 이들이 입맛에 따라 오용하기 쉽다. ‘인문학의 부흥을 통한 사람다움의 회복’을 열망하는 이들에겐 맥 빠지는 이야기다.

2010년대에 들어 국내에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을 때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90년대부터 팽배해진 인문학 위기론 가운데 잠깐 불어온 미풍에 그치거나 2000년대 중반 경영계에 유행한 인문학 바람의 연장선상에 있으니 실용적·기능적 접근에 머물 것이라고 봤다. 다행히 일시적 유행은 아니었다. 동서양 고전이 새로운 번역과 편집으로 독자들을 찾아갔고 인문학을 쉽게 풀이한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인문학자의 대중 강연이 지상파 방송과 전국의 문화센터에서 잇따라 열렸다. 압권은 2014년 출간된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대한민국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강의 내용이 담긴 책이 100만부 넘게 팔린 나라가 됐다.

조심스레 기대를 품는 이들도 늘어났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이룬 대한민국에는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이 결핍돼 있다. 국내총생산(GDP)이나 교역액 같은 숫자를 뛰어넘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정신적·문화적 성숙이 필요하지만, 평생 주입식 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에겐 기본 소양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를 타개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인문학 열풍은 한국 사회를 바꿔 놨을까. 이공계 출신에 대한 기업들의 편애는 더 심해졌고 대학들은 인문계 학과의 구조조정에 열심이다. 정치권은 패거리 문화와 극단주의에 휘둘린다. 성찰과 자성을 촉구하는 이에겐 쌍욕과 문자폭탄이 쏟아진다. 포털이나 커뮤니티의 댓글은 반지성적 혐오와 폭력이 활개를 친다. ‘사람이 먼저다’는 구호가 무색하게 사람을 이윤과 이권 추구의 도구나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목에 힘을 주고 다닌다.

그래도 절망하긴 이르다. 인문학의 힘은 생각의 힘이고 사람의 힘이다. 당장 눈에 띄진 않아도 서서히 변화의 에너지를 축적해나간다고 믿는다.

송세영 문화스포츠레저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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