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희망의 사람들] 강점기 금강산 관광객 15만명 실어나르던 철로엔 잡초만

글,손영옥,조현택 2021. 10. 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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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 중간역..내금강행 1931년 개통
북으로 뻗던 철길 동으로 방향 틀어
여행 특수로 번성하던 물류중심지
분단·한국전쟁에 할퀴어 폐허로
지난달 말 강원도 철원군 정연리 군부대 안에 있는 금강산전기철도교량 아래로 한탄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금강산전기철도교량은 일제강점기 철원역과 금강산의 내금강역을 연결하는 한국 최초의 전기철도다. 분단으로 철로 교각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평화관광 장소로만 기념되고 있지만, 언젠가 ‘금강산 90키로’ 여정을 달려 금강산 관광 가는 날을 손꼽아본다.

“금강산! 새벽 네 시!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금강산을 보게 된다는 일정이다.…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금강산! 참말 천하의 절승이요. 세계의 명산이지! 만폭동 좀 기이하며 구룡연 좀 웅장하든가’하며 나를 쳐다볼 때는 ‘글쎄! 그런가부데?!’하고 얼굴이 빨개지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나로서는 네 시는 그만두고라도 두 시라도 이를 악물고 다녀와야 속이 풀릴 지경이다. 철원의 넓은 벌에서 몸을 바꾸어 싣고 김화를 지내니 달라지는 물색(物色)과 높아지는 산세는 장차 무슨 별다른 정경이 전개될 듯한 예감을 준다.”

1930년대 한반도에는 금강산 관광 붐이 일었다. 경원선(서울-원산) 중간역인 철원역에서 내금강 역 가는 전차가 31년 개통된 게 기폭제였다. 부산이나 서울에서 밤새 침대차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철원역에 내려 전차를 갈아타고 편안하게 금강산 여행 가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35년 11월 5일 자에 신문에 실린 ‘금강 순례기’라는 제목의 이 글을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철원은 금강산 특수로 번성하는 도시가 됐다.

그때의 영광을 더듬어보려고 지난달 말 찾아간 옛 철원역 터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이곳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옛 노동당사 옆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있다. 이 일대는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쑥대밭이 됐다.

옛 철원역 철로를 복원하며 함께 복원한 완목신호기(위)와 철원역 안내판(아래 사진). 코로나19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주변에 잡풀이 무성해졌다.


남북관계가 좋아지고 경원선 일부 구간(서울 용산-철원 백마고지)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수년 전에 이곳 철로와 플랫폼 일부가 상징적으로 복원됐다. 경원선 복원기념 상징탑까지 세워지며 평화관광 코스로 사랑받았다. 코로나19 사태는 상황을 반전시켰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자 복원된 철로는 잡초로 완전히 가려졌다. 정부 예산으로 조성한 플랫폼을 따라 주민이 몰래 농사지은 고추가 붉게 익어가는 풍경이 방치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고추밭에는 통표 받던 걸이, 풀밭에는 완목신호기가 낯설게 서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잡초를 제거하니 그제야 철로의 흔적이 두 줄 또렷이 드러났다. 그 옛날 금강산을 향해 출발하던 전차를 실었던 기억을 간직한 채 동으로 뻗어 있는 두 줄이었다.

“경성에서 원산으로 가던 철로가 여기서 동쪽으로 갈라져 금강산으로 갔던 거지요.”

한참 풀숲을 헤친 끝에 철로가 갈라진 지점이 나오자 동행했던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이 말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철원역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전했다. 철원역사는 적벽돌 2층 건물에 전체 규모가 5만평에 달했다. 근무하는 역무원만 80명이 넘었다.

검문소에서 옛 철원역까지 차로 이동하는 2분여 거리에 일제강점기 농산물검사소, 얼음창고, 철원제2금융조합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이 일대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알려주는 유적들이다. 분단과 6·25전쟁은 그 모든 영광을 지웠다. 인구 10만명에 달했던 철원 인구는 지금 4만500여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철원은 지금도 금강산 철도 여행의 흔적을 어슴푸레 간직하고 있다. 내금강으로 향하던 철로의 교각 잔해가 몇 군데 남아 있는 것이다. 김 소장의 안내를 받아 답사한 교각 잔해는 까마득한 옛날 화산이 폭발해 생겨난 철원의 지형적 특색을 살려 현무암 벽돌로 쌓은 것이었다. ‘금강산 가는 철길!’이라고 표시한 곳도 있지만, 아무런 표시가 없는 곳도 있었다. 교각 주변으로는 철원의 너른 평야가 펼쳐졌다. 과거 금강산 여행객들이 차창 밖으로 내다보며 감탄했던 그 넓은 벌이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금강산전기철도교량 철로 위에 서 있는 멋쟁이 여성들을 담은 것으로 금강산 여행이 성행했던 시절을 보여준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이 제공했다.


금강산 가는 철길의 마지막 흔적은 정연리 군부대 내에 있는 금강산전기철도교량이다. 남한 땅에서 볼 수 있는 최후의 흔적이다. 금강산전기철도교량은 일본 회사에 의해 26년 설치됐다. 처음에는 인근 창도 지역의 풍부한 유화 철을 흥남 지역 제련소를 거쳐 반출하기 위해 이 철도교량을 운행했다. 이처럼 산업용이었던 것이 금강산 관광용으로 확장됐다. 철원역을 출발해 금강산 가는 전철은 내금강까지 116.6㎞를 하루 8회 운행했다. 4시간 반 코스로 요금은 당시 쌀 한 가마 값이던 7원56전이었다고 한다. 36년에는 연간 15만4000여명이 이 교량을 이용했을 정도로 금강산 여행은 성업했다.

이 교량에서 본 경치는 장관이었다. 교량 너머 펼쳐진 주상절리는 유유히 흐르는 강과 어우러져 한 폭 산수화 같았다. 철도가 놓이기 전에는 육로를 통해 갔다. 조선시대 후기에도 문인들 사이에 금강산 여행 붐이 일었는데 이 코스가 사용됐다. 당대 최고 화가 겸재 정선도 이 길을 따라 금강산 여행을 가며 부근 경치를 그린 ‘정자연도’를 남겼다.

금강산 관광은 2008년 이후 중단됐다. 남북관계가 다시 좋아져 그 옛날 조선의 선비들처럼, 일제강점기 여행객처럼 이 철로를 따라 금강산 가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끊어진 철길! 금강산 90키로’. 교량에 새겨진 굵은 글씨는 그 소망을 토해내고 있었다.

조현택은 누구

조현택(39)은 대학에서 사진영상학을 전공했으며 도시와 도시의 경계 지대에서 펼쳐지는 풍경과 사건의 편린들에 관심을 갖고 작업한다. 2009년 대안공간 풀에서 가진 개인전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서울 광주 부산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했다. 올해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떠오르는 마음, 맞이하는 영혼’에 참여했다.

후원: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철원=글 손영옥 전문기자·사진 조현택 사진작가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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