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유전불사, 무전불생

민태원 2021. 10. 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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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치료비 때문에 가계가 파탄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2017년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보장성강화대책을 직접 발표하며 내건 국민적 약속이다.

새 치료제(졸겐스마)를 한 번 쓰면 아이 상태가 나아질 수 있는데, 약값 25억원을 감당할 수 없다며 신속한 건강보험 적용을 촉구했다.

생명과 직결된 신약의 경우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가 가능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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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고 치료비 때문에 가계가 파탄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2017년 8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보장성강화대책을 직접 발표하며 내건 국민적 약속이다. 정부는 지난 8월 문재인 케어 4주년 행사를 통해 그간 중증 질환 중심의 보장성 강화로 3700만명이 약 9조2000억원의 의료비를 아꼈다고 자화자찬했다. 과연 ‘병원비 걱정없는 든든한 나라’는 구현되고 있는 걸까.

최근 말기 혈액암이나 희귀난치병 환자, 그 가족들이 놓인 처지를 보면 먼 나라 얘기 같다.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신약이 허가돼 있음에도 상상도 못할 약값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거나 가계가 파탄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평생 한 번 사용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혁신적인 ‘원샷(One Shot) 치료제’지만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달하는 초고가라는 게 문제다. 그 정도 약값을 댈 수 없는 환자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기를 목매 기다리다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개중에는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은 아이들도 적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열세 살 고(故) 차은찬군은 다섯 살 때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받고 갖은 치료법을 동원했지만 세 번의 재발을 겪으며 더 이상 할 게 없는 암담한 상황에 처했다. 유일한 희망이 올해 3월 국내에 들어온 ‘킴리아’라는 카티(CAR-T) 치료제뿐. 몸 속 면역세포인 T세포를 이용한 항암제다. 건강보험이 되지 않아 4억6000만원이 있어야 쓸 수 있다. 가족은 집을 팔아서라도 약값을 마련하려 했으나 아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지난 6월 갑자기 병이 악화돼 하늘나라로 떠났다. 차군처럼 카티 치료제를 필요로 하는 국내 말기 혈액암 환자는 200여명으로 파악된다. 시급히 손을 쓰지 않으면 대부분 3~6개월 내에 죽음을 맞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

얼마 전 희귀 근육병인 척수성근위축증(SMA)을 앓는 12개월 딸을 둔 엄마의 애절한 사연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새 치료제(졸겐스마)를 한 번 쓰면 아이 상태가 나아질 수 있는데, 약값 25억원을 감당할 수 없다며 신속한 건강보험 적용을 촉구했다. 이 병은 유전자 결함으로 근육이 점점 굳어가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두 돌 전에 생명을 잃을 수 있다. 최근 치료제 사용 허가를 받았지만 비급여인 탓에 희망고문이 되고 있다.

의학기술 발전으로 이런 첨단 유전자·세포치료제들은 앞으로 계속 등장할 것이다. 기존과 달리 병든 유전자나 세포를 대체하는 방식이어서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행 시스템상 국내 허가 후 건강보험 급여 등재까지는 1년 이상 걸리며 그사이 신약 접근성에 차별이 존재한다. 경제적 능력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은 약을 살 수 있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눈앞에 약이 있어도 써 보지 못하고 사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유전불사(有錢不死), 무전불생(無錢不生)’이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인데도 경제적 사정을 이유로 생명과 건강에 관한 권리에 있어 차별받는 결과를 초래한다.

환자단체와 혈액암 환자, 가족들은 지난 1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이런 상황이 헌법상 보장된 생명권, 행복추구권, 평등권은 물론 보건의료기본법상 ‘경제적 사정을 이유로 자신과 가족 건강에 관한 권리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고 첨단재생바이오법상 ‘첨단재생의료기술 적용 시 사회경제적 지위에 관계없이 쉽게 접근하도록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국가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약값을 지불할 수 있는지에 따라 죽고 사는 게 결정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생명과 직결된 신약의 경우 신속한 건강보험 등재가 가능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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